때는 멀지 않은 미래. 비가 거센 어두운 밤, 당신은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자율주행’으로 달리고 있다. 고갯길을 넘자마자 눈앞에 도로 보수 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차는 알아서 속도를 줄인 뒤 차선을 바꿔 유유히 피해간다. 당신은 몰랐지만, 차는 그 길이 공사 중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정밀 디지털 지도’ 기술로 실시간 도로 정보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정밀 지도는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차선의 간격, 도로의 경사도, 도로 인근 구조물 등 미세한 정보가 모두 담겨있는 3D 지도다. /Here Technologies

‘정밀 디지털 지도’란 네이버지도나 T맵 같은 일반 내비게이션용 지도보다 훨씬 고도화된 지도다. 일반 지도가 입체 현실을 평면에 그린 것이라면, 정밀 지도는 도로의 굴곡, 표지판이나 차선 두께 등 도로상 모든 정보를 촬영해 3D 화면으로 만든 것이다. 자율주행차가 운전자 조작 없이 스스로 차선을 바꿔가며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전하려면 이 정도 수준의 정밀 지도가 필요하고, 그래서 자율주행차 기술 발전과 함께 각광받고 있다.

정밀 지도 데이터를 실제 도로 사진 위에 덮어 씌운 이미지. /Here Technologies

이 업계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회사가 ‘히어 테크놀로지스’(Here Technologies)이다. 히어는 세계 최대 지도 전문 기업으로, 일반 지도 데이터와 정밀 지도 데이터를 모두 갖고 있다. 전 세계 200국의 일반 지도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고, 5만개 가까운 건물 실내 지도도 확보했다. 아우디·BMW·다임러 등 독일 자동차 3사가 공동 소유하고 있고, 미국 인텔·독일 보쉬·일본 미쓰비시가 투자했다. 현대차그룹 등과도 협력하고 있다.

에자드 오버빅 히어 테크놀로지스 최고경영자(CEO) /Here Technologies

이 회사의 에자드 오버빅(Overbeek) 최고경영자는 최근 Mint 화상 인터뷰에서 “자율주행차, 드론 택시 등 미래 이동 수단 상용화에 고도화된 정밀 디지털 지도 기술은 필수”라며 “5단계 완전 자율주행차의 시대도 머지않았다”고 했다. 리서치앤마켓은 자율주행차를 위한 정밀 지도 시장 규모는 올해 13억달러(약 1조5000억원)에서 2030년 204억달러(약 24조원)로 15배 이상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오버빅 CEO는 후지쓰·지멘스·시스코를 거쳐 2016년 히어에 합류한 정보기술(IT) 전문가다.

◇세계 최고 디지털 지도, 사용자가 함께 만든다

–왜 자율주행에 정밀 지도가 필요한가.

“1~2단계 자율주행은 사람이 주로 운전하고 차가 돕는다. 카메라·라이다(LiDAR·레이저 측정 장치) 등 ‘센서’만으로도 어느 정도 구현됐다. 그러나 차가 주로 운전하고 사람이 모니터링하는 3단계부터는 차가 도로 정보를 미리 알고 교통 상황을 사전에 예측해야 한다. 센서만으론 부족하다. 악천후에는 센서가 인식을 못 할 수도 있고, 언덕이 시야를 가로막아 쓸모없어질 수도 있다. 센서 기술에 정밀 지도가 더해지면, 차에 탑재된 컴퓨터가 차량의 현 위치를 센티미터(㎝)단위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사고 예방에 도움이 된다. GPS 항법 지도(오차 범위 10m 안팎)로 봐선 차가 1차선에 있는지 또는 3차선에 있는지를 모르지만, 히어의 정밀 지도(오차 범위 4~5㎝)로 보면 안다.”

차에 정밀 지도가 탑재돼 있다면 뭐가 다를까. 히어 측은 "자동차가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왼쪽은 센서만 있을 경우에 자동차가 인식하는 도로 상황을 표현한 이미지. 차 주변만 선명하고 나머지는 흐릿하다. 센서에 정밀 지도까지 다 있을 경우엔 오른쪽처럼 도로 전반에 대해 명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Here Technologies

–테슬라는 카메라 센서와 항법 지도만으로 오토파일럿을 제법 잘 구현했다.

“물론 테슬라 기술은 대단하다. 그러나 자율주행차는 무엇보다 안전해야 한다. 차가 시속 100㎞로 달리면 1초 만에 약 28m를 움직인다. 아주 작은 오류로도 사고가 날 수 있다. 센서가 얻은 정보를 지도에 대입해 자율주행을 구현하면 안전 장치가 중복 작동해 안전성이 더 높아진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많은 자동차 회사가 정밀 지도를 찾고 있다.”

-히어의 독보적 기술은 뭔가.

“'오픈 이노베이션'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도를 사용자들과 함께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파트너사가 우리가 오랜 기간 축적한 지도 정보로 내비게이션 서비스 등을 한다. 서비스 과정에 쌓이는 정보는 다시 데이터베이스로 축적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지도가 풍성해지고 사소한 오류도 수정된다. 데이터베이스의 크기와 품질이 향상되면서 우리와 파트너십을 맺으려는 고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다시 데이터가 쌓이는 선순환이 발생한다. 나는 이와 같은 ‘오픈 이노베이션’의 신봉자다.”

–지도 데이터는 어떻게 축적하나.

“일단 라이다가 탑재된 차량을 사람이 몰고 도시와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초기 지도를 만든다. (히어는 전 세계 100여대의 차량을 운영하고 있다) 이후 우리 지도 앱(HERE WeGo) 사용자나, 공용 와이파이 등의 위치 정보로 지도를 고도화한다. 예컨대 어떤 지점에 스마트폰 신호가 잡힌다면 그곳엔 길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모든 데이터는 철저하게 암호화돼 개인 정보 침해 우려는 없다. 이런 식으로 실시간 지도와 실내 지도를 만들 수 있다.”

미래 자율주행차가 실시간으로 정밀 지도를 업데이트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가상 이미지. /Here Technologies

◇35년째 지도만 그리는 지도 장인

히어의 전신은 1985년 미국에서 창업해 내비게이션 지도를 만들던 ‘나브텍’(Navteq)이다. 2007년 노키아가 인수했고, 2015년 노키아 구조조정 과정에서 독일 자동차 3사가 컨소시엄을 꾸려 28억유로(약 3조8000억원)에 샀다. 창업 후 35년째 지도 제작만 하는 장인 회사다. 히어는 대부분의 사업을 ‘오픈 플랫폼’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 국내 수입되는 재규어·랜드로버 차량의 순정 내비게이션은 히어 지도를 쓴다.

–한국은 규정상 지도 데이터를 한국 영토 밖으로 유출할 수 없다. 한국 지도는 어떻게 만드나.

“한국뿐 아니라 중국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을 불허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선 현대엠엔소프트, 중국에선 나브인포와 협업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에서 측량한 데이터는 한국 안에서만 제작·활용되고 해외로 나가지 않는다.”

–정밀 지도로 자율주행 말고 어떤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나.

“수송·물류 사업에서 쓰임새가 높다. 정밀 지도가 있으면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로 배달할 수 있다. 광고 사업도 각광받는 분야다. 예컨대 어젯밤 온라인 쇼핑몰에서 본 제품을 갖고 있는 백화점 매장 위치를 안내해줄 수도 있다. 실내 건물의 정밀 지도 데이터까지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히어는 전세계 200개국의 지도 데이터를 확보한 세계 최대 지도 전문 업체다. 측량 차량, 히어 지도앱 사용자, 공용 와이파이 등을 활용해 지도 데이터를 모으고, 정밀 지도 형태로 제작한다. /Here Technolog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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