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낸드플래시 메모리 업체 키옥시아가 대형 클라우드(가상 서버) 사업자와 2029년까지 적용되는 3년짜리 장기공급계약(LTA)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대만 디지타임스가 8일(이하 현지 시각) 보도했다.
LTA는 분기 단위로 이뤄졌던 반도체 공급 계약을 장기로 전환한 것으로 수년간 물량과 가격을 미리 정해둔다. 공급 부족이 심할 때 수요처가 물량을 선점하기 위해 활용하는데, 키옥시아의 낸드플래시가 품귀 현상을 빚자 빅테크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다. 키옥시아는 이미 올해 생산 물량이 전량 완판됐고 내년까지도 공급 부족 현상을 예상하고 있다.
그동안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범용 D램을 중심으로 진행됐던 LTA가 낸드플래시까지 영역을 넓혔다. 최근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로소프트(MS)와 DDR5 3년 장기 계약을 협상하고, 미국의 마이크론이 물량과 가격 확정 내용이 담긴 5년짜리 전략적 고객 협약(SCA)을 맺는 등 D램 시장에 LTA가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낸드까지 확보하기 위한 테크 업체들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것이다.
◇“학습에서 추론으로”...낸드 수요 폭발
낸드플래시 메모리 수요가 폭증한 이유는 AI 활용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챗GPT 같은 AI 챗봇이 주목을 끌던 AI 초기엔 많은 양의 데이터를 AI에 사전 학습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전송할 수 있는 HBM을 이용해 AI 모델을 구축했다. 하지만 최근 AI 트렌드의 무게 중심은 ‘학습’에서 ‘추론’으로 넘어갔다. 학습이 AI 모델을 구축하는 일이라면, 추론은 수억 명의 질문에 실시간으로 답을 내놓고 막대한 데이터를 생성하는 작업이다. 긴 질문과 답변 속 맥락을 유지하려면 기존 내용을 저장하고, 실시간 검색으로 알아낸 지식을 담아놓는 ‘그릇’이 필요한데, 낸드플래시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낸드플래시에 들어가는 컨트롤러를 설계하는 실리콘모션의 월리스 코우 최고경영자(CEO)는 “AI 추론은 학습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 저장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 단계에서는 또 저장된 데이터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불러오는 것이 중요한데, 낸드플래시 업체들이 내놓은 기업용 SSD(eSSD)가 기존에 많이 쓰던 저장 장치 HDD(하드디스크 드라이브)보다 읽기 속도가 3배 이상 빨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여기에 4~6년 주기의 데이터센터 서버 교체 주기가 도래했고, 데이터센터 대용량 저장용인 ‘니어라인 HDD’ 공급 부족 현상이 고용량 SSD 수요를 자극하며 불을 지폈다. 업체들은 데이터 저장 최소 단위인 셀(Cell) 하나에 4비트를 저장해 용량을 높이고 효율을 개선한 고가 제품인 ‘QLC SSD’를 택하면서 낸드플래시 업체들의 수익도 큰 폭으로 늘고, 계약 희망자가 늘어났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작년 1월까지만 해도 2.18달러였던 128Gb MLC 낸드플래시는 올 3월 17.73달러로 8배가 됐다.
◇너도나도 LTA 맺고 수익 극대화
지난 1월 29일 낸드플래시 전문 업체인 샌디스크의 루이스 비소소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선수금 조건이 포함돼 있고, 추가 계약 항목도 있는 LTA 1건을 체결 완료했다”고 밝혔다. 샌디스크는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키옥시아와 일본 요카이치와 키타카미 공장 합작 투자 계약도 2034년까지 5년 연장하고, 키옥시아에 제조 서비스 및 공급 가용성 확보 대가로 11억6500만달러(약 1조7000억원)를 지급하기로 했다. 낸드플래시 수요가 더 커질 것으로 보고 1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고켈러 샌디스크 CEO는 “데이터센터 저장 용량 수요 성장 전망이 연초 20%대 중반에서 60%대 후반으로 대폭 상향됐다”고 밝혔다. 기업용 SSD 시장을 주도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자회사 솔리다임 역시 글로벌 빅테크들의 밀려드는 주문에 대규모 장기 계약 체결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DD 시장의 움직임도 빠르다. 웨스턴디지털은 이미 하이퍼스케일러 7개사와 확정 발주 계약을 맺었고, 이중 3개사와는 2027~2028년까지 대규모 물량과 가격이 확정된 LTA를 체결했다. 경쟁사인 씨게이트의 윌리엄 모슬리 CEO도 “올해 씨게이트의 니어라인 HDD 물량이 전량 배정됐고, 주요 클라우드 고객과 2027년까지 LTA가 체결돼 있다”고 밝혔다. 씨게이트는 작년 10~12월 분기 매출이 1년 전보다 21.5% 증가한 28억3000만달러를 기록해 매출총이익률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밝혔다.
특히 낸드플래시와 HDD는 서로의 수요를 밀어 올리며 ‘순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AI에 저장 스토리지 수요가 지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낸드플래시 가격이 급등하면 같은 용량 기준으로 SSD 가격의 10분의 1 수준인 HDD의 비용 경쟁력이 부각되며 HDD 수요가 증가한다. 반대로 HDD 공급이 부족해지면 다시 고효율 대용량 SSD로 수요가 이동하는 것이다. 전체 스토리지 시장이 거대한 ‘호황의 쳇바퀴’에 올라탄 셈이다.
낸드 업체들은 이런 호황 속에도 증설에 소극적으로 나서며 당분간 공급 부족에 따른 초호황을 누릴 계획이다. 키옥시아는 올해 설비 투자에 작년보다 40% 늘린 4000억엔을 쏟기로 했지만, 이는 2023년(5100억엔) 수준에 못 미친다. 이 때문에 메모리 업계에선 3~5년 단위의 LTA가 주요 계약 수단으로 자리 매김하고, 반도체 업체들이 안정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으로 본다. 공급사 입장에서 이익 변동성이 줄고 투자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LTA 계약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빅테크와 대규모 LTA를 맺지 못한 소비자 및 중소 수요처는 물량 확보 자체가 어려워지는 시장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