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CEO

첨단 반도체와 장비의 반입을 금지한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가 중국의 인공지능(AI) 개발 사업에 큰 타격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내 AI 투자가 줄고, 중요 AI 모델 개발도 위축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AI 기술 격차는 더 확대되고 있다.

미국의 스탠퍼드대 AI 연구소가 15일(현지 시각) 내놓은 ‘글로벌 AI 인덱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AI 민간 투자는 672억달러(약 94조원)로 중국 77억6000만달러의 8.7배에 달한다. 2022년과 비교해 미국은 22.1% 늘었지만, 중국은 44.2% 감소했다. 중국은 이 보고서가 처음 나온 2017년부터 2022년까지 AI 민간 투자 액수 세계 2위를 쭉 지켰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유럽연합(EU)에 추월을 당해 3위를 기록했다. 중국의 작년 투자액은 2017년(약 62억달러)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급감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AI 굴기’를 조기에 진압하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4월 반도체 자립을 선언하며 본격적으로 대중 제재에 나선 후, 미국은 이듬해 엔비디아의 그래픽 처리 장치(GPU) 등 첨단 반도체의 중국 공급을 막고, 중국 첨단산업에 대한 자국 기업의 투자도 금지했다. 엔비디아의 첨단 AI 반도체를 확보하지 못한 중국 기업들은 AI 개발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AI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현재 2년 정도인 미국과 중국 간 AI 역량 차이가 곧 10년 정도로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중국의 인공지능(AI) 연구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방대한 데이터와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아 연구 수준에서 중국의 AI 기술은 미국에 필적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매크로폴로에 따르면 학부 기준 상위 2% AI 연구자의 국적별 비율은 미국 28%, 중국 26%, 인도 7% 순이다. 세계 AI 특허에서는 중국이 61.1%로 미국(20.9%)을 압도한다. 세계 AI 관련 논문에서도 중국은 39.8%를 차지하며 미국(10.0%)을 크게 앞선다.

하지만 중국의 AI 기술은 최근 상용화의 벽에 막혀 있다. 미국의 대중 제재로 엔비디아의 그래픽 처리 장치 등 첨단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해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스탠퍼드대 AI 연구소의 ‘글로벌 AI 인덱스’ 보고서가 꼽은 중국의 중요(significant) AI 모델 개수는 15개에 불과해 미국(61개)과 유럽연합(21개)에 한참 못 미친다.

◇엔비디아 밀수 시장 등장

바이두, 텐센트, 알리바바 등 주요 기술 기업들이 주도한 중국의 인공지능 기술은 3~4년 전만 해도 미국이 견제에 나설 정도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기업의 이용자 개인정보 수집을 강하게 규제하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중국 기업들은 14억 자국민 데이터를 별다른 규제없이 자유롭게 수집하면서 역량을 키워왔다. 중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육성한 AI 안면 인식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그래픽=김하경

미국 정부의 대중 첨단 반도체 규제는 이같이 급성장한 중국의 AI 산업을 정면으로 겨눴다. 2022년 8월 엔비디아·AMD 등 미국 기업의 고성능 AI 반도체에 대해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싱가포르 컨설팅회사 애널라이즈아시아의 버나드 렁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방송에 “AI를 개발하기 위해선 미국 하드웨어(AI 반도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게 중국의 가장 큰 취약점”이라고 했다.

AI 훈련에 고성능 AI 반도체를 사용하려는 기업들의 요구에 중국엔 엔비디아 반도체 밀수 시장까지 등장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A100, H100 등 엔비디아 AI 반도체를 몰래 들여오는 시장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며 “A100 제품은 미국에서 개당 약 1300만원에 팔리지만, 중국 밀수 시장에선 개당 2300만~270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이 첨단 AI 개발에 고전하는 것은 숫자로 확인된다. ‘글로벌 AI 인덱스 보고서’는 해마다 국가별로 개발한 중요 AI 모델 개수를 산출하는데, 미국은 61건, 유럽연합(EU)이 21건을 기록한 반면, 중국은 15건에 그쳤다. 중국 알리바바의 차이충신 회장은 최근 “중국 기업이 엔비디아의 그래픽 처리 장치와 같은 첨단 반도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미국의 수출 제한 조치가 확실히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 ‘대체 반도체’ 개발

중국은 미국 제재를 뚫고 AI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AI 반도체 자립을 시도하고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막겠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화웨이가 개발한 AI 반도체 ‘어센드 910B’다.

어센드 910B는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SMIC가 7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 공정으로 제조했다. 화웨이의 AI 반도체는 현재 출시된 가장 좋은 성능의 엔비디아 H100보다 성능은 떨어진다. 엔비디아의 이전 모델인 A100와 비교해도 70~80% 수준으로 알려졌다. 가격은 엔비디아 A100보다 60% 정도 비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화웨이는 지난해 바이두에 1600개의 칩을 공급하기로 하는 등 올해 초까지 최소 5000개를 수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AI 회사 아이플라이텍(iFlytek)도 화웨이의 어센드 칩을 기반으로 생성형 AI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병탁 서울대 교수는 “대규모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무기를 만들 듯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중국이 당장 엔비디아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 반도체 스타트업 대표는 “엔비디아의 A100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웨이의 AI 반도체는 H100과 속도나 용량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날 것”이라며 “중국이 베끼기를 통해 하드웨어를 비슷하게 만든다고 해도 엔비디아 AI 반도체의 핵심인 소프트웨어까지 따라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