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프런티어

영국 정부는 최근 브리스톨대에 2억2500만파운드(약 3600억원)를 투입해 수퍼컴퓨터 ‘이삼바드-AI’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반도체 5448개를 탑재해 현재 영국이 보유한 기존 수퍼컴퓨터보다 10배 빠른 수퍼컴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 수퍼컴을 2024년 여름부터 신약 개발과 에너지 분야에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세계 각국이 수퍼컴퓨터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수퍼컴퓨터란 1초에 수조 번, 수경 번 연산이 가능한 고성능 컴퓨터다. 연구·산업 현장의 판도를 획기적으로 바꿀 ‘게임 체인저’로 꼽힌다. 세계 각국은 수퍼컴 개발에 수천억원을 쏟아붓고 있다.

그래픽=이지원

◇상위 10위 내 5대가 미국

현재 수퍼컴퓨터의 주류는 1초당 1000조(兆) 번 연산이 가능한 페타플롭스(PF)급이다. 이보다 1000배 빠른 엑사플롭스(EF)급은 1초에 100경(京) 번 연산이 가능하다. 5월 기준 공식적으로 순위에 등재된 EF급 수퍼컴퓨터는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가 보유한 ‘프런티어’가 유일하다. 프런티어는 초당 약 119경 번 연산이 가능한 1.194EF 성능을 발휘한다. 미 테네시대 잭 돈가라 교수는 “지구상 모든 사람이 동원돼 4년 걸릴 계산을 1초 만에 해내는 것”이라고 했다. 프런티어에는 프로세서가 5만개 들어간다. 그 규모도 테니스 코트 2개에 달한다.

현재 수퍼컴 시장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한다. 전 세계에서 성능이 좋은 수퍼컴 10대 중 5대는 미국에 있고, 2대는 중국에 있다. 일본은 세계 2위 성능의 수퍼컴 후가쿠 1대를 보유하고 있고, 핀란드는 3위 성능의 루미를 확보 중이다. 중국의 ‘선웨이 타이후라이트’와 ‘톈허-2A’는 각각 수퍼컴 순위 7위와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국가들도 수퍼컴 경쟁에 뛰어들었다. 독일 퍼텍과 프랑스 에비덴은 유럽연합(EU) 최초의 엑사급 수퍼컴퓨터 ‘주피터’를 내년 구축할 계획이다. 영국도 에든버러대에 현재 보유한 28PF보다 약 50배 빠른 엑사급 수퍼컴퓨터를 구축할 예정이다. 이미 수퍼컴 주도권을 차지한 미국과 중국도 질주하고 있다. 아직 공식 순위에 집계되지 않았지만 미국 아르곤연구소엔 2EF의 ‘오로라’가 설치됐고, 미국 로렌스리버모어 국립연구소에도 2EF급 수퍼컴퓨터가 구축 중이다. 중국은 미·중 갈등으로 정확한 내용을 공개되지 않았지만 두 대의 엑사급 수퍼컴퓨터를 추가로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빅테크들도 참전했다. 테슬라는 100EF 성능의 수퍼컴퓨터 구축을 목표로 삼았고, 구글은 올해 초 인공지능(AI)용 수퍼컴퓨터 A3를 공개하고 이 수퍼컴이 최대 26EF 성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엔비디아도 세계 9위 성능인 자체 수퍼컴퓨터 ‘셀레네’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픽=이지원

◇3시간 만에 코로나 단백질 분석

전 세계가 더 빠른 수퍼컴퓨터 개발에 사활을 건 이유는 무궁무진한 활용 가능성 때문이다. 우주 현상 탐구와 핵융합 같은 과학적 연구부터 기후 변화 연구, 비행기·원자로 설계 같은 산업현장까지 여러 방면에 수퍼컴이 쓰인다. 암 극복 등 신약 개발에도 활용된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때 수퍼컴퓨터는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의 후가쿠는 사람이 몇 주씩 걸릴 코로나 단백질 연구를 단 3시간 만에 분석해냈다. 덕분에 빠르게 백신이 개발될 수 있었다. 최근 챗GPT 등장으로 생성형 AI 개발 열풍이 불면서 수퍼컴퓨터의 존재감은 더 커지고 있다. AI 대규모 학습에 수퍼컴퓨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수퍼컴퓨터 경쟁에 한참 뒤처져 있다. 전 세계 상위 500대 수퍼컴퓨터 중 순위에 든 한국의 수퍼컴은 8대다. 삼성전자가 보유한 수퍼컴은 20위로 한국 기관 중 순위가 제일 높지만 성능은 25.2PF로 세계 정상급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진다. 수퍼컴퓨터는 인텔, IBM, 휼렛패커드 엔터프라이스(HPE) 등이 주로 제작하는데, 국내에는 자체 제작할 회사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는 600PF 성능의 새로운 수퍼컴퓨터를 구축하려고 입찰 공고를 냈지만 4번이나 유찰돼 도입이 불투명하다.

☞페타플롭스(PF)·엑사플롭스(EF)

플롭스는 컴퓨터의 성능 단위. 페타플롭스(PF)는 1초당 1000조번, 엑사플롭스(EF)는 1초당 100경(京)번 연산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1EF는 1PF 속도의 1000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