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반도체가, 한국은 백신이 급한데… - 반도체와 코로나 백신이라는 최고의 전략 자원을 각각 손에 쥔 한·미가 상생의 동맹을 맺을 수 있을까. 조 바이든 미 대통령(왼쪽)은 지난 12일 ‘반도체 대책회의’중 삼성전자 앞에서 반도체 소재 웨이퍼를 들어보이며 “미국에 투자하라”고 외쳤고, 지난 1월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은 경북 안동의 SK바이오사이언스 공장을 찾아 미 노바백스의 코로나 백신을 들어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7일(현지 시각)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더 많은 코로나 백신 확보를 위해 백신 원료와 제조 설비 수출을 통제하는 국방물자생산법(DPA)을 시행하면서 미국 외에서의 백신 생산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백신에 자국 우선주의를 적용하면서, 다른 나라들의 백신 확보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백신을 전략 무기화하고 백신 물량 축적에 나서면서 한국의 백신 도입 일정도 큰 차질을 빚고 있다. 한국 정부는 당초 오는 9월까지 전체 인구의 60~70%에 백신을 접종해 11월까지 집단면역을 이루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스트라제네카·얀센 백신의 부작용과 화이자·모더나 백신 공급 지연으로 실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미국 중심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한국 기업들이 적극 동참하는 대가로 미국에서 백신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산업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백신 한미 동맹'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지난해 말 시작된 반도체 공급 부족은 미국의 주력 산업인 자동차 공장을 멈춰 세웠고, 테크 산업 전반으로 영향이 확산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2일 백악관에서 삼성전자·인텔 등 글로벌 기업 경영진과 가진 화상 반도체 대책회의에서 미국 내 반도체 투자를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삼성전자는 20조원 규모의 미국 반도체 라인 증설을 검토하고 있지만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라인 증설은 경제적 효과나 산업 파급력, 일자리 창출 모두에서 한국이 미국에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협상 카드로 평가된다.

서정선 분당서울대병원 석좌교수는 “미국이 아무 조건 없이 백신을 줄 리는 없는 만큼 한국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반도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처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기업인들이 나서 미국에 대한 투자, 미국 기업에 필요한 반도체 우선 공급을 제안한다면 미국을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美백신 기술이전 되면, 국내기업들 대량생산 6개월내 가능

‘세계의 백신 공장’ 인도에 비상이 걸렸다. 세계 최대 백신 위탁 생산(CMO) 업체인 인도혈청연구소가 미국의 금수 조치로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미국 노바백스 백신의 생산을 중단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자국 내 코로나 백신 비축분을 늘리려는 미국 정부는 한국 6·25전쟁기에 제정한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동, 백신 제조와 관련된 37개 원료와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고 나섰다. 한 달에 코로나 백신 1억6000만회 접종분을 생산하던 인도혈청연구소는 금수 조치가 지속될 경우 4~6주 내에 대규모 생산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다급해진 이 회사 다르 푸나왈라 대표는 지난 16일 트위터를 통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코로나 백신 원료 금수 조치를 해제해달라”고 호소했다.

부럽네요, 파티장 같은 美백신 접종 현장 - 지난 1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의료원에서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들이 귀가에 앞서 상담원에게 접종 완료 사실을 알리고 있다. 접종 현장은 ‘오늘은 너의 날이야’ ‘축하해’ 같은 문구가 적힌 풍선이 내걸려 마치 파티장 같은 분위기였다. /로이터 연합뉴스

선진국들의 백신 무기화가 본격화하고 있다. 화이자·모더나 같은 미국산 백신이 아니라도, 미국이 옥죄면 코로나 백신 생산이 안 되는 냉엄한 현실을 인도의 사례가 보여준다. 인도에 이어 유럽의 백신 생산도 원료 부족으로 차질이 생기면서 해외 공급이 막히고 있다. 백신 확보에 뒤처진 한국으로선 안정적인 백신 확보를 위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산업계에서는 한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백신 확보를 위해 우리가 경쟁력을 가진 반도체와 배터리를 지렛대 삼아 미국의 첨단 백신과 그 기술을 확보하는 빅딜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제2의 코로나 대비해 RNA 백신 생산을

한국이 목표로 삼아야 할 백신은 미국 화이자와 모더나가 개발한 mRNA(전령RNA) 백신이다. 두 백신은 미국과 유럽에서만 생산된다. 최근 아스트라제네카와 미국 얀센의 코로나 백신이 혈전 부작용을 보이면서 두 회사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높아지고 있다. 일본은 백신 구매 협상에서 장관 말고 총리가 나서라는 화이자의 요구에도 군말 없이 응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다른 백신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mRNA 백신은 생산이 불가능하다. 이번에 처음 상용화된 방식이어서 기술 이전이 아니면 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용홍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은 “mRNA 백신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유전자 설계가 모두 특허 기술이어서 당장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결국 미국과 협력해 mRNA 백신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전문가들은 기술 이전이 최선이지만 위탁 생산분의 일부를 국내에서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CMO 계약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코로나 대유행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면서 5년 뒤까지 내다본 원천 생산 기술 확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코로나 백신 접종이 올해뿐 아니라 독감 백신처럼 향후 수년간 매년 접종해야 한다면 이번에 자체 생산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ESG 경영 개념에서 대기업 투자 필요

새로운 백신 생산 라인 구축은 최근 대기업들에 화두가 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차원에서 진행될 수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통해 국제기구와 함께 코로나 백신 개발에 수조 원대 투자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전염병 대유행 시대에 백신을 공급하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사회 공헌 활동”이라고 말했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반도체와 배터리 빅딜에 참여한 대기업들이 삼성바이오로직스나 SK바이오사이언스 등 기존 대기업 백신 생산 시설에 투자하면 이르면 6개월 내 mRNA 백신 생산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기존 바이오 의약품 공장을 mRNA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로 바꾸려면 통상 1~2년 걸리지만 한국 업체들의 집중 투자가 있다면 6개월이면 가능하다는 것. 국내 500대 기업이 사회 공헌 사업에 연간 3조원 안팎을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기업이 협력하면 자금 여력도 충분하다.

과거에도 우리나라는 IT(정보 기술) 분야에서 정부와 대기업이 협력해 D램 반도체 개발과 이동통신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경험이 있다. 서동철 중앙대 약대 교수는 “새로운 전염병이 계속 출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백신 산업은 우리나라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