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대의 반도체 메이커 TSMC 본사 건물./AFP 연합뉴스

5G(5세대) 통신·인공지능·자율주행차·클라우드 같은 미래 산업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를 둘러싼 세계 각국의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미·중 무역갈등, 한국과 일본간 소재·부품 전쟁 등 국지전 형태로 벌어지던 테크 패권 다툼이 반도체 확보를 위한 세계대전(世界大戰)으로 확전되는 양상이다. 비교적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유럽연합까지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 확보에 나서며 참전을 선언했다. 첨단 기술을 가진 반도체 업체들을 유치하기 위한 각국의 노력도 눈물겨울 정도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4890억달러(약 545조원)로 대한민국 전체 국가 예산(558조원)과 맞먹는 수준이고, 매년 성장폭이 더 가팔라지고 있다.

◇조용하던 유럽까지 반도체 전쟁 참전

블룸버그통신은 11일(현지 시각) “유럽연합(EU)이 독일과 프랑스의 주도로 최대 500억유로(약 67조1175억원) 규모의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면서 “EU는 삼성전자와 TSMC의 참여를 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재무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와 TSMC의 참여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두 회사는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선도 기업인 만큼 EU 프로젝트에 참여가 가능하다”면서도 “다만 아직까지 결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TSMC와 삼성전자는 블룸버그의 취재에 답변하지 않았다.

EU는 지난 2019년말 미래 산업 기술확보와 노동시장 안정화를 위해 ‘EU 공동 관심 분야 주요 프로젝트(IPCEI)’를 출범했다. 첫 프로젝트로는 독일·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 7국 정부와 자동차 업체 BMW·오펠, 화학업체 바스프 등이 함께 참여하는 32억유로 규모 자동차 배터리 프로그램이 선정됐다. 이번에 추진하는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 확보는 IPCEI의 두번째 프로젝트인 셈이다. 앞서 지난 6일 페터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장관은 “독일은 반도체 제조 기술 프로젝트에 10억유로를 즉시 투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알트마이어 장관은 “독일과 EU에 특허·개발·생산 기능을 모두 갖춘 첨단 산업 공급 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의존하는 현 상황을 극복하지 않으면 미래 기술 경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다고도 했다.

EU의 목표는 EU 내에서 10나노미터(nm) 이하 초미세공정을 이용한 반도체 생산 거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소식통에 따르면 최종 목표는 2나노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장기적으로 EU는 전세계 반도체칩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의 20% 이상을 EU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네덜란드 NXP, 독일 인피니온 등 유럽내 반도체 회사들은 대부분 차량용에 특화된 반도체 위주 기업인데다, 최첨단 공정을 확보하지 못해 삼성전자와 TSMC 등에 파운드리를 맡기고 있는 처지이다. 결국 EU가 반도체 제조기술 발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을 가진 업체들을 끌어들여 공장을 짓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전세계에서 유이하게 10나노 이하, 5나노급 반도체 제조기술을 보유한 TSMC와 삼성전자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일본도 생산 시설 확보 총력전

유럽의 반도체 프로젝트에 대한 시장의 전망은 부정적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늦게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해부터 정부 자금 지원, 세제 혜택 등을 내세워 구애를 펼친 끝에 TSMC 반도체 개발 회사 유치에 성공했다. TSMC가 거점으로 삼게 될 도쿄 인근 쓰쿠바시는 일본내 최대 반도체 연구개발 단지이다. 일본은 TSMC와 일본 내에 반도체 생산라인을 설치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협의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오스틴 반도체 사업장 전경.

미국 역시 지난해 TSMC의 첫 해외 반도체 공장을 애리조나에 유치한데 이어 최근에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라인 증설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연일 텍사스 오스틴, 뉴욕 버팔로, 애리조나 등을 삼성전자의 공장 건설지 후보로 거론하며 중계하듯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내에서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반도체를 생산하도록 하는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애플·인텔·퀄컴 등 미국 핵심 첨단 기술의 상징 같은 업체들이 대만이나 한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기술 유출 가능성을 줄이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반도체 굴기’를 위해 투자와 기술 개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전세계적인 반도체 대란으로 차량 생산이 줄어들고 TV, 스마트폰업체마저 감산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반도체 물량을 확보하는 것이 업체들의 최우선 과제이면서 국력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 상황이어서 당분간 치열한 경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