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 이후 처음 열린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목소리가 거셌다. 자사주 소각과 독립이사 선임 등 주주 권리 강화를 요구하는 주주제안이 잇따랐다. 그러나 이들 안건 대부분은 실제 주총에서 부결됐다.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31일 열린 LG화학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정관 변경 안건 가운데 ‘권고적 주주제안 도입’이 부결되면서, 이에 연동된 영국계 행동주의 펀드 팰리서캐피털(Palliser Capital)의 주주제안 건이 자동 폐기됐다. 선임독립이사 선임 안건 역시 부결됐다. 앞서 팰리서는 권고적 주주제안 도입, 선임독립이사 선임, 자사주 매입·소각과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 지분 유동화 등을 요구했다. 팰리서는 LG화학의 지분 0.67%를 보유하고 있다.
LG화학 최대 주주인 LG(34.95%)와 2대 주주인 국민연금공단(8.56%)이 반대한 영향이 컸다. 앞서 국민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는 팰리서의 권고적 주주 제안 도입이 “이사회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자본 배분 정책과 관련해서도 “회사가 이미 LG에너지솔루션 지분 유동화 계획을 공시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지분 유동화는 주주 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같은 날 열린 태광산업 주주총회에서도 국내 행동주의 펀드 트러스톤자산운용(Trustone)이 제안한 안건 가운데 감사위원 분리 선임 확대만 가결됐고 나머지 안건은 모두 부결됐다. 트러스톤은 권고적 주주 제안 제도 도입 의무화, 1대50 주식 액면 분할, 자사주 소각 등을 요구했지만 주총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호진 태광산업 회장의 우호 지분은 54.53%에 달한다.
지난달 20일 열린 DB손해보험 주주총회에서도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제안한 감사위원 선임 안건은 통과됐지만 사내·사외이사 선임, 정관 변경 등 주요 안건은 원안대로 가결됐다. 앞서 얼라인파트너스는 공개서한을 통해 요구자본이익률(ROR) 기반 경영 도입, 지급여력비율(K-ICS) 목표 하향, 연결 기준 주주환원율 50% 확대 등 8개 항목을 요구했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행동주의 펀드들의 주주제안이 이어졌던 배경으로는 상법 개정이 꼽힌다. 국회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2차 상법 개정안과 자사주 소각 등을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이 잇달아 통과되면서 주주 보호와 주주권 강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주주제안의 실제 가결률은 여전히 낮지만, 기업 의사결정 구조에 균열을 낸 의미 있는 변화로 평가하고 있다. 이남우 한국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이번 주총에서 소수 주주들의 행동주의 펀드 안건 지지율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며 “특히 DB손해보험에서 감사위원 선임이 실제로 관철된 것은 의미 있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팰리서가 LG화학에 제안한 안건은 대부분 부결됐지만 소수 주주 찬성률은 각각 56%, 42%로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트러스톤이 태광산업에 제안한 사외이사 후보도 부결됐지만 찬성률이 49.8%에 달했다. DB손해보험에서는 얼라인파트너스가 제안한 이사 후보가 선임됐는데, 이는 국내 보험사에서 주주 표 대결을 통해 이사가 선임된 첫 사례로 평가된다.
행동주의 펀드 주주제안 실효성을 위해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회장은 “지분율이 높은 외국인 펀드는 주총 2주 전 의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내 상장사의 주총 공지가 통상 2주 전에 이뤄져 의결권 행사 기간이 짧다”며 “여기에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 등이 사전에 공개된다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