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보여준 밸류업 개혁의 속도와 야심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하지만 수십 년간 가족 지배 체제에 익숙해진 이사회의 사고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국계 가치투자 운용사 에셋밸류인베스터스(AVI)의 조 바우언프로인트(Joe Bauernfreund) 최고경영자(CEO) 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24일(현지 시각) 조선비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이같이 진단했다.
1985년 설립된 AVI는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글로벌 운용사다. 순자산가치(NAV)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가족 경영 지주사나 자산주 등에 주로 투자하며,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숨은 가치를 끌어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특히 지난 10여년 간 일본 시장에서 수십 곳의 저평가 기업을 상대로 지배구조 개혁 캠페인을 이끌어 온 노하우를 갖고 있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우선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이어진 일련의 제도 개편을 높이 평가했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상법 개정안 3건이 통과됐고, 배당소득세 개편과 계열사 중복 상장 금지 등도 추진하면서 한국 자본시장의 고질적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다만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짚었다. 그는 “코스피 상장사의 66%가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 35%가 0.5배 미만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며 “이 같은 저평가는 개혁이 이제 막 손대기 시작한, 수년간 누적된 주주가치 훼손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제도 변화의 방향은 옳지만, 시장에 누적된 불신과 할인은 그만큼 뿌리가 깊다는 의미다.
그는 AVI가 오랜 기간 투자해 온 일본의 사례가 한국의 앞날을 가늠하는 데 있어 시사점을 준다고 했다. 일본 역시 2012년 아베노믹스를 계기로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본격화됐지만, 실제 기업 현장에서 문화적 변화가 체감되기까지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회사 차원의 진정한 변화는 더디게 진행됐다”며 “이사회가 보다 긴박하게 움직이고 사고방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23년 도쿄증권거래소(TSE)의 강력한 지침이 나온 뒤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으로 전망했다. 법과 제도를 고치는 것과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 문화가 달라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가족 지배 체제 아래 굳어진 소수주주 경시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는 게 바우언프로인트 CEO의 판단이다. 결국 한국의 밸류업은 제도 개혁을 넘어 문화 개혁이라는 더 중요한 과제를 앞두고 있다는 얘기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최근 한국 상장사들의 대응 방식에 대해 “명과 암이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약 200개 상장사가 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했고, KT&G와 SK㈜의 대규모 자사주 소각처럼 실질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고 짚었다. 정부 주도의 밸류업 정책이 일부 기업의 행동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려되는 흐름도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일부 중견 재벌 기업들이 주주총회에서 새로운 입법 취지를 사실상 우회하는 안건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이를 두고 “밸류업 프로그램의 신뢰도를 훼손하고, 한국 기업 지배구조에 대해 국제 투자자들이 오랫동안 품어온 의구심을 재확인해주는 악의적인(bad-faith)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법의 빈틈을 먼저 찾는 행태가 반복된다면 개혁의 실질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경고로 해석할 수 있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형식적인 밸류업 공시 역시 문제로 꼽았다. 현재까지 나온 가치 제고 계획 중 상당수가 사실상 ‘보일러플레이트(boilerplate·판에 박힌 상투적 문구)’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구체성과 야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기업은 이미 달성 중인 자기자본이익률(ROE), PBR, 배당성향을 목표치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시장과 주주 입장에서 보면 그저 규제 대응용 공시에 불과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기업들이 주가 저평가를 해소하고 싶다면 단순한 현상 유지가 아니라 시장이 검증할 수 있는 ‘시한이 분명한’ 약속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조치에 대해, 그는 무엇보다 이사회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봤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한국 기업 이사회 가운데 상당수는 경영진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만한 전문성이 부족하다”며 “학계, 법조계, 정부 출신 중심의 사외이사 구조는 자본배분 문제를 따지고 내부거래를 엄정하게 들여다보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사외이사가 ‘독립적’이라는 형식만 갖췄을 뿐, 실제로는 경영진 판단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지배구조를 오랫동안 규정해 온 ‘거수기 이사회’ 문화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도 우려했다. 이사회가 진정으로 독립적이고, 자본시장과 사업을 함께 이해하는 적절한 역량을 갖추기 전까지는 대주주나 경영진의 판단을 사실상 추인하는 관행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밸류업의 핵심은 단순히 배당을 늘리거나 자사주를 소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의사결정 구조 자체를 바꾸는 데 있다는 게 AVI의 시각이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주주환원 측면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글로벌 기준에 크게 못 미친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사들에 비해 이익의 극히 일부만 주주에게 환원하고 있다”며 “배당성향은 낮고, 자사주 매입은 드물며, 지주사 차원에선 뚜렷한 재투자 명분 없이 현금을 쌓아두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기업들이 현금을 보수적으로 쌓아두는 관행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 자금이 왜 쌓이는지,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없다는 점이 시장의 할인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취지다.
바우언프로인트 CEO는 이 문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국내 기관 투자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봤다. 그는 특히 최근 들어 보다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국민연금을 언급하며, 문제 기업과 부적절한 행태를 더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기업들이 법 취지를 우회하더라도 그에 따른 실질적 불이익이 크지 않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한국 스튜어드십 문화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으며, 기관투자자들의 감시와 압박이 더 강화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시각은 국내 증시의 대표적 저평가주 중 하나로 거론되는 영원무역홀딩스를 바라보는 AVI의 평가에도 드러난다. AVI는 개별 기업에 대한 구체적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면서도, 영원무역홀딩스에 대해선 “세계적인 프리미엄 의류 제조업체를 보유한 기업으로, 수십 년간 운영상 탁월함과 강한 현금 창출력을 보여왔다”고 평가했다.
다만 그 같은 본업의 우수성이 현재 기업가치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거버넌스와 자본 배분, 공시 기준이 사업의 질과 주주 기대에 걸맞게 더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