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6년 3월 23일 16시 51분 조선비즈 머니무브(MM)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140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24일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최윤범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안에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다. 최 회장 등 기존 경영진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기업의 경영권 분쟁 국면에서 대체로 기존 경영진과 현 이사회 쪽에 우호적이었다. 다만 오너 리스크나 주주가치 훼손 우려가 있을 때는 경영진과 이사회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고려아연 경영진 역시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권익 침해’ 이력이 문제가 됐다는 게 국민연금 측 입장이다.
◇‘주주가치 훼손’ 논란에 등 돌린 국민연금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는 24일로 예정된 고려아연 정기주총에서 최윤범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안과 사측 사외이사 후보 선임안에 의결권을 미행사하고, 제5호 안건인 이민호 감사위원 선임안에 반대하기로 했다. 영풍-MBK 측 박병욱 기타비상무이사 후보에 대해서도 의결권 미행사를 결정했다.
국민연금은 그 대신 의결권 지분 5.3%를 미국 측 크루서블JV의 추천 후보(월터 필드 맥랠런)와 영풍-MBK 측 나머지 이사 후보들(최연석·최병일·이선숙)에게 절반씩 나눠 행사하기로 했다. 즉 맥랠런 후보가 2.65%를 받고 최연석·최병일·이선숙 후보 3인이 나머지 2.65%를 나눠 받는 구조다.
국민연금이 최 회장 측에 표를 주지 않고 경쟁 진영 후보들에게 표를 분산해주기로 한 것은, 최 회장 측의 득표 순위를 뒤로 밀어내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민연금은 구체적 판단 근거를 항목별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다만 업계에서는 고려아연의 2조5000억원 규모 유상증자 추진과 이그니오홀딩스 인수 과정에서의 기업가치 과대 계상 의혹,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 손실 논란 등이 배경으로 거론된다.
실제 일부 의결권 자문사도 최 회장의 재선임 반대 사유로 기업가치 훼손 및 주주권익 침해를 들며 유상증자와 이그니오 인수,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 등을 문제삼은 바 있다.
◇ SK·현대차의 든든한 방패... ‘장기적 주주가치 제고’ 중요시
국민연금이 이처럼 기존 경영진 및 이사회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사례는 흔치 않다. 조선비즈가 2000년 이후 주요 경영권 분쟁 사례를 분석해본 결과, 국민연금은 기존 경영진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한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SK그룹과 소버린 간 분쟁이다. 당시 의결권 지분 3.6%를 보유했던 국민연금은 SK를 지지해 분쟁 종식에 힘을 실어준 바 있다. 2006년 KT&G와 칼 아이칸·스틸파트너스 간 대결에서도 국민연금은 회사 측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한 2인을 지지했다.
국민연금은 이후 2019년 현대차·현대모비스와 엘리엇의 표 대결에서도 회사 측 제안에 찬성하고 엘리엇의 배당·사외이사·정관변경 요구에 반대했다. 이듬해인 2020년 한진칼 주총에서도, 2021년 (주) 한진 주총에서도 핵심 안건에서 사측이 제시한 안을 지지했다. 금호석유화학의 경우도 2021년과 2022년, 2024년 모두 배당·정관변경·감사위원 선임 등 핵심 안건에서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2024년 한미사이언스 정기주총에서도 국민연금은 “이사회 안이 장기적인 주주가치 제고에 더 부합한다”며 회사 측 후보의 선임에 힘을 실어줬다. 같은 해 12월 한미약품 임시주총에선 기존 이사 해임과 후속 선임안에 모두 반대했다.
◇ 대한항공·한국타이어 오너에겐 엄격한 잣대
물론 국민연금이 기존 경영진이나 총수 일가에 제동을 건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항공이다. 국민연금은 2019년 조양호 회장 사내이사 연임안에 반대했고, 연임안은 실제 부결됐다. 2021년에는 아시아나항공 인수 계약 과정에서의 실사 미실시와 불리한 계약 우려 등을 이유로 조원태 회장과 일부 이사·감사위원 선임에 반대했다.
국민연금은 2024년에도 조원태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했으며, 올해 한진칼 정기주총에서도 조 회장의 재선임안에 반기를 들었다. 2대주주 호반그룹과의 지분율 차이가 1.78%포인트(p)에 불과한 상황에 대주주이자 기존 경영진의 손을 놓은 것이다.
한국타이어그룹도 비슷한 사례다. 국민연금은 2021년 한국앤컴퍼니 주총에서 핵심 쟁점이던 감사위원 분리선출 안건에선 회사 측이 아니라 주주제안 후보를 지지했다. 같은 해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주총에선 조현범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하고,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 선임에선 주주제안 후보를 지지했다. 2022년 한국앤컴퍼니 주총에서도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재선임에 반대했다.
국민연금의 기준은 일관적인 편이다. 기존 경영진의 편을 들 때는 ‘장기적인 주주가치 제고’에 방점을 뒀으며, 반대로 총수나 현 이사회에 제동을 걸 때는 ‘기업가치 훼손’, ‘주주권익 침해’, ‘감시의무 소홀’ 등을 주된 근거로 들었다.
업계에서는 향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잣대가 더욱 엄격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 2018년 7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이후 올해 정기주총부터는 의결권 행사 방향의 사전 공개 대상을 기존 ‘지분 10% 이상 보유 기업’에서 ‘5% 이상 보유 기업’으로 대폭 넓혔기 때문이다.
IB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주주권익 침해를 이유로 고려아연 경영진을 견제한 것은 향후 상장사들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될 것”이라며 “경영권 방어의 정당성을 ‘주주가치 제고’라는 시장 논리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연기금이 이번처럼 외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