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란 군사 충돌 장기화 우려에 국제 유가가 치솟으며 국내 증시를 강타했다.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며 약 3년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유가 쇼크가 전해지자 우리 증시는 5% 넘게 폭락했다.

유가 상승이 시차를 두고 반영됐던 과거 사례와 달리, 이번에는 반영 속도가 이례적으로 빠르고 낙폭도 깊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유가 상승 그 자체보다 고유가 국면의 장기화 가능성이 증시 펀더멘털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란 사태로 국제유가가 폭등한 가운데 코스피가 6% 급락하며 5,200대로 마감한 9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 코스피가 표시돼 있다. 코스피는 전장 대비 333.00포인트(5.96%) 내린 5,251.87에, 코스닥은 52.39포인트(4.54%) 내린 1,102.28에장을 마쳤다. 원/달러 환율 19.1원 오른 1,495.5원이다. /연합뉴스 제공

뉴욕상업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6일 4월물 서부텍사스유(WTI) 선물은 전 거래일 대비 9.89달러(12.20%) 오른 90.9달러에 마감했다. 이날에는 2022년 7월 이후 처음으로 100달러를 돌파한 뒤 상승 폭을 키우며 오후 1시 43분 기준으로는 25.1달러(27.61%) 오른 116달러에 거래됐다.

미·이란 갈등 장기화가 유가를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중동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공급 차질 우려가 커졌다. 미국은 해협 운항 재개를 위해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시장에서는 호위나 보험 지원 등 구체적인 조치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주요 산유국들의 감산 움직임까지 겹치며 공급 불안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라크는 하루 150만 배럴(bpd) 감산 계획을 밝혔고 쿠웨이트 역시 생산과 판매를 중단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국제 유가가 단기간에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고 수주 내 147달러 수준까지 상승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유가가 급등하자 한국 증시는 급락했다. 9일 코스피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330(5.96%) 하락한 5251.87로 마감했다. 장중 8% 넘게 급락하면서 20분 넘게 매매가 중지되는 ‘서킷 브레이커’도 발동했다.

이번 증시는 과거 유가 급등기보다 변동성이 훨씬 더 극심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가 충격이 시차를 두고 반영되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증시 하락 압력이 즉각적이고 폭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다.

정해창 대신증권 연구원은 “과거에는 유가 상승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경기 둔화와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지며 증시에 영향을 줬다”며 “이번에는 미국 경기 둔화 우려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유가 급등이 인플레이션 우려를 급격히 키우면서 곧바로 주가 하락으로 연결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단기 급등에 따른 차익 실현 욕구도 낙폭을 키웠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한국 증시가 연초 이후 글로벌 증시 대비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상황에서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가 부각되자 상대적으로 조정 압력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와 콘덴세이트의 80% 이상을 수입하는 구조라 충격이 더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과거 사례를 보면 유가 급등이 반드시 즉각적인 증시 하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앞선 3차 오일 쇼크 당시인 2008년, 유가는 2월 90달러 선에서 7월 145달러로 급등했으나 코스피 지수는 오히려 1800선까지 상승했다. 오히려 유가가 110달러 선에서 횡보하던 7월 이후부터 코스피는 하락을 이어가며 1000선까지 밀렸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발발한 2022년에도 유가 급등이 선행하고 증시 하락은 후행하는 흐름을 보였다. 당시 유가는 2월 말 배럴당 90달러 수준에서 3월 초 110달러를 넘어섰지만 코스피는 같은 기간 2700선까지 상승했다. 이후 고유가와 인플레이션 우려가 지속되면서 지수는 점차 하락 압력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유가 급등 자체는 단기적으로 주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으나 시장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전쟁 장기화 여부라고 분석했다.

고유가 국면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안전 자산 선호 심리가 강화되며 달러 강세가 나타날 수 있고, 동시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면서 소비 둔화와 기업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면 기업의 기초 체력(펀더멘털)에도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주식 시장 측면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전쟁의 장기화 여부”라며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인플레이션 우려를 넘어 긴축 우려까지 등장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흐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현재는 미국 국채 금리와 국제 유가의 흐름을 비교했을 때 글로벌 시장이 반영하고 있는 리스크의 크기는 다소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