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부자는 많습니다. 하지만 자산가들이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 FO)를 제대로 운용하기엔 지금의 투자 문화와 규제 환경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세제 개편부터 금융 교육, 시장 구조 전반의 체질 개선이 병행돼야 합니다.”
권기정 NH앱솔루트리턴파트너스(NH ARP) 법인장은 패밀리오피스의 본질을 ‘자산가의 눈높이에 맞춘 장기 전략’이라 정의하며 이같이 강조했다. NH투자증권의 싱가포르 법인인 NH ARP는 대체 자산 전문 운용사다.
2009년부터 싱가포르 금융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권 법인장은 영국계 투자은행(IB) 등을 거쳐 2020년 NH에 합류했다. 오랜 기간 헤지펀드와 패밀리오피스 등 글로벌 투자 주체들과 호흡해 온 그는 싱가포르 자본 시장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현지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권 법인장은 “한국에선 일정 규모의 자산을 갖게 되면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산이 1000억원을 넘어서면 단순 PB로는 부족하다”며 “전략적인 자산 배분과 리스크 관리가 필요한 패밀리오피스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 자산가들은 직접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하기보다 은행이나 증권사가 제공하는 ‘FO 서비스’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이에 대해 그는 “패밀리오피스의 본질은 자산가가 별도 법인을 세워 자산을 이전하고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라며 “한국은 여전히 PB 중심의 자산관리 수준에 머물러 있어 시장 전체로 보면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다.
제도적 공백도 걸림돌이다. 현재 한국에는 패밀리오피스를 정의하는 별도 규정이 없고, 일반 투자법인이나 컨설팅 회사 구조를 빌려 운영되고 있다. 금융회사가 운영하는 패밀리오피스 서비스 역시 제도적 가이드라인 없이 각 사의 내부 기준에 따라 제각각 제공되고 있다.
국내 패밀리오피스의 시초는 2008년 종합유선방송사 씨앤엠(C&M)을 매각한 이민주 회장이 설립한 에이티넘파트너스로 꼽힌다. 당시 1조5000억원에 달하는 매각 대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에이티넘의 뒤를 잇는 신규 설립 사례는 극히 드물다.
가장 큰 장벽은 징벌적 세제 구조다. 현재 국내 구조상 패밀리오피스를 운영하면 자산 운용 수익에 대한 법인세와 배당소득세가 중복 발생해 세부담이 가중된다. 자산가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직접 패밀리오피스를 세울 유인이 부족한 셈이다.
권 법인장은 일정 규모 이상의 자산을 갖춘 패밀리오피스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고, 세제 인센티브와 함께 적격 투자자 제도를 정교화하는 방향의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정책적 지원이 병행될 경우, 패밀리오피스는 단순한 자산관리 수단을 넘어 금융업 전반의 질적 성장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패밀리오피스들이 많아지면 자산운용사·증권사들이 이에 맞춰 양질의 금융 상품을 내놓게 되고, 고품질의 금융 상품이 결과적으로 많아질 수 있다”고 했다.
자산운용사인 NH ARP는 사모펀드(Private Equity), 사모대출(Private Debt) 중심의 대체투자에 주력하고 있다. 투자 특성상 다양한 패밀리오피스와의 접점도 많다.
수많은 자산가를 곁에서 지켜본 권 법인장은 패밀리오피스 투자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로 ‘금융 IQ’를 꼽았다. 그는 “싱가포르 내 자산가들은 다양한 투자 상품의 구조나 리스크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다”며 “가령 미국 중소기업에 대출해 주는 사모대출 펀드를 소개하면 싱가포르 자산가들은 수익률보다 부도율이나 업종 리스크를 먼저 따지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 자산가들은 수익률에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단기 성과 중심의 투자 성향도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권 법인장은 “한국 시장은 여전히 단기 상품에만 매몰돼 있다”며 “과거 만기 11년짜리 미국 펀드를 국내에 소개하려 했을 때, 3년을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시장 반응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이어 “단기 성과에만 급급한 투자 행태는 불황이 닥쳤을 때 자산 전체를 잃게 만드는 치명적인 리스크가 된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좋은 금융 상품 선별을 위한 금융회사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짚었다.
권 법인장은 “한국과 싱가포르의 고액 자산가와 패밀리오피스가 접할 수 있는 상품군이 다르다”며 “물론 한국의 연기금 등 큰 기관들은 좋은 투자 상품을 접할 수 있지만, 일반 금융회사들은 해외 상품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내부적으로 관련 상품이 승인 단계에서 막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권 법인장은 패밀리오피스가 국내 금융 산업의 체질 개선을 이끄는 핵심 축이 될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눈높이 높은 패밀리오피스들이 늘어날수록 금융사들도 그에 걸맞은 책임감과 전문성을 갖춘 상품을 공급하게 된다”며 “이는 자산관리(WM), PB 등 금융업 전반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