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자산가들 사이에서 패밀리오피스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늘었고 증권사들도 관련 서비스를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프라이빗뱅킹(PB) 마케팅용으로만 활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탈리아 독립 자산운용사 아지무트(Azimut Investment Management)의 김형국 한국 WM 부문 대표는 국내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 FO) 시장의 현주소를 이같이 진단했다. 글로벌 자산가들이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자산 증식을 위해 싱가포르로 향하는 동안, 한국은 여전히 ‘PB 서비스의 확장판’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김 대표는 한국 맥쿼리증권에서 근무하다 2015년 아지무트에 합류했다. 아지무트는 이탈리아 최대 규모의 독립 자산운용사로, 여러 자산가의 자금을 통합 운용하는 ‘멀티 패밀리오피스’ 분야에 특화되어 있다. 현재 유럽을 기반으로 싱가포르, 홍콩, 호주 등 전 세계 21개국에서 글로벌 자산관리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2015년만 해도 한국 고객에게 패밀리오피스를 언급하면 ‘가족끼리 사업하는 것이냐’고 되물을 정도로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증권사들이 싱가포르 사례 등을 학습하며 자산관리(WM) 사업에 패밀리오피스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명칭만 도입됐을 뿐, 실제 패밀리오피스 본연의 기능과 구조를 갖추고 운영되는 사례는 여전히 드물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 유럽·미국 자산가들이 싱가포르로 가는 이유… 결국은 세금
싱가포르가 아시아 패밀리오피스의 중심지로 급부상한 배경에는 파격적인 세제 혜택이 있다. 일정 수준의 자산만 예치하면 법인세 면제는 물론, 취업비자(Employment Pass, EP) 발급 등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패밀리오피스 열풍이 싱가포르까지 확산된 배경에는 이러한 강력한 세금 이점이 자리 잡고 있다.
김 대표는 “약 230억원(2500만 싱가포르달러) 규모의 자산을 싱가포르에 예치하면 법인세 면제 혜택과 함께 경영진을 위한 EP가 발급된다”며 “이러한 혜택 덕분에 최근 3~4년 사이 해외 자산가들이 대거 유입됐고, 직접 법인을 세워 자산을 운용하는 ‘싱글 패밀리오피스’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아시아 패밀리오피스 시장을 양분하던 홍콩의 입지가 2020년대 들어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흔들린 점도 싱가포르에는 기회가 됐다. 김 대표는 “아지무트가 홍콩에도 거점을 두고 있어 현지 사정에 밝은데, 현재 홍콩은 상하이나 베이징에서 유입되는 자금이 기존 외국인 자본의 유출분을 메우고 있는 실정”이라며 “최근 홍콩이 다시 자금 유치에 나서며 중국 비즈니스가 시급한 자산가들이 일부 복귀하긴 했지만, 여전히 싱가포르로 자산을 옮기려는 대기 수요가 줄을 잇고 있다”고 덧붙였다.
◇ “자산 3000억원 이상이면 ‘싱글’, 그 이하면 ‘멀티’가 유리”
김 대표는 패밀리오피스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선 자산 규모에 따라 전략을 다르게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산 규모가 3000억~5000억 원 이상이라면 직접 ‘싱글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해 전담 운용역을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그 미만이라면 전문 운용사의 ‘멀티 패밀리오피스’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비용과 운영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라고 조언했다.
아지무트는 투자 자산의 80~90%를 미국 시장에 두고 있다. 김 대표는 “고객 대부분이 연 7~8% 수준의 안정적인 절대수익률을 추구하기 때문에, 주식보다는 채권과 대체투자 등 다양한 자산군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또한 싱가포르 정부의 세제 혜택 유지를 위한 현지 투자 요건을 맞추기 위해 로컬 자산에도 배분하고 있다. 그는 “정부 규정에 맞춰 전체 포트폴리오의 10%는 싱가포르 리츠(REITs)나 주요 금융주 등 로컬 자산에 넣어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세제 부담 줄이고 투자 생태계 잡혀야 ‘진짜’ 패밀리오피스 나와”
해외 자산가와 달리 한국 자산가들은 직접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제약이 있다. 김 대표는 “한국의 이른바 ‘재벌’로 불리는 자산가들은 대부분 주식 부자일 뿐, 현금 유동성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경영권 방어와 지분 유지를 위해 주식을 매각하기 어려운 구조인 만큼,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해 운용하기에는 유동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다 보니 최근 패밀리오피스에 관심을 보이는 국내 자산가들은 대체로 기업을 매각했거나 엑시트(Exit)를 통해 거액의 현금을 확보한 이들이 주를 이룬다. 김 대표는 “이러한 자산가들은 기존 PB 서비스에 자산 관리를 일임하기보다, 본인이 직접 자산 운용에 관여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며 “자산 운용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니즈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패밀리오피스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 패밀리오피스 시장이 안착하기 위해 세제 혜택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양질의 투자 상품 공급’과 ‘금융 교육’을 꼽았다.
그는 “한국 자산가들은 본인의 전문 분야에서 성공한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투자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이라며 “반면, 싱가포르 자산가들은 투자 자체가 일상화돼 있어 금융 상품에 대한 이해도나 관심이 훨씬 높다”고 설명했다. 이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금융 교육을 통해 단타(단기 투자)·레버리지 위주 투자가 아닌,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해 꾸준히 수익을 내는 것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또 “글로벌 투자 상품은 미국·유럽에서 먼저 소화되고 싱가포르·홍콩 등으로 넘어오는데, 시간차와 제도 차이로 한국까지 좋은 상품이 오기 어려운 구조”라며 “한국에 부자는 많은데, ‘좋은 투자 상품이 없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 이유”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금융 교육을 통해 다양한 상품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생겨야 좋은 운용사가 생기고, 더불어 좋은 상품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생긴다”며 “이를 통해 패밀리오피스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