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패밀리오피스가 초고액 자산가들의 눈높이에 맞춰 진화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출발선에 머물러 있다. 아시아 패밀리오피스의 허브로 우뚝 선 싱가포르 현장 취재를 통해 한국 자산관리 시장의 한계와 과제를 짚어본다. 특히 규제 완화와 세제 개편을 통해 글로벌 자본을 끌어모은 싱가포르의 전략을 분석하고, 국내 금융 산업이 고도화된 자산관리 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 이하 FO) 시장이 급팽창하는 가운데, 싱가포르가 독보적인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현지에 등록된 FO는 약 2000개로, 2020년(400개)과 비교해 5년 새 5배나 급증했다.

FO의 뿌리는 200여 년 전 유럽의 금융 명문가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문의 부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고용된 ‘집사’ 시스템이 오늘날 FO의 시초로 평가된다. 이후 미국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이 자산 관리 조직을 공식화하면서 현대적인 금융 서비스 모델로 정착했다.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인 래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에 위치한 오피스 빌딩 단지. 독일의 세계적인 투자은행(IB) 도이치은행도 이곳에 있다. /강정아

글로벌 컨설팅업체 딜로이트는 2024년 기준 전 세계 FO 수가 약 8030개에 달하며, 오는 2030년에는 1만 개를 돌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들의 운용 자산(AUM)은 약 8000조원 규모다. 시장조사기관 모르도르 인텔리전스는 순자산 3000만달러(약 429억원) 이상을 보유한 전 세계 초고액 자산가(UHNWI)가 지난해 51만명을 넘어섰다고 분석했다. 특히 이들은 전체 자산의 약 45%를 대체 투자에 할당하며 공격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패밀리오피스는 크게 특정 가문의 자산만을 전담하는 ‘싱글 패밀리오피스(SFO)’와 여러 가문의 자산을 함께 관리하는 ‘멀티 패밀리오피스(MFO)’로 나뉜다.

SFO는 특정 자산가 가문만을 위한 조직으로, 맞춤형 전략 수립과 철저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이 강점이다. 그러나 운용·인사·법무 등 고정 비용이 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산 규모가 3000억원 이상일 경우에만 실익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반면, MFO는 여러 자산가의 자산을 함께 운용하며 비용을 나눌 수 있어 효율성이 높다. 대신 개별 가문에 최적화된 전략 수립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금융사들도 패밀리오피스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대형 증권사와 은행은 주로 MFO 형태의 서비스부터 확대해 나가는 추세다. 프라이빗뱅킹(PB) 고객을 위한 고도화된 자산관리 설루션 제공을 목표로, 세무·법무 전문가와 협업 또는 해외 거점을 활용해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일부 금융사는 싱글 패밀리오피스 설립을 돕는 컨설팅 및 투자 플랫폼 제공에도 나서고 있다.

그래픽=정서희

싱가포르가 자산가들의 선택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정적인 규제 환경과 개방적인 금융 인프라 덕분이다. 단순히 자산을 보관하는 수준을 넘어 자산 운용, 상속·승계, 세무·법률 자문, 거버넌스 관리까지 통합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서의 신뢰도 역시 자산가 유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도 한몫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개인 소득세 최고세율이 24%, 법인세 단일 세율이 17%로, 한국(49.5%·26.4%) 대비 세금 부담이 낮다. 특정 요건을 충족한 패밀리오피스 펀드는 ‘지정 투자(DI)’를 통해 발생한 이자, 배당 등 소득에 대해 법인세가 면제된다. 상속세와 증여세가 없다는 점은 자산가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요소다.

싱가포르는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대신 일정 수준의 고용과 투자를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세제 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선 운용 자산 규모가 최소 2000만 싱가포르달러(SGD·약 226억원) 이상이어야 하며, 2~3명의 투자 전문가를 고용해야 한다. 또 운용 자산 중 싱가포르 현지 자산에 최소 10% 또는 1000만SGD(약 113억원)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패밀리오피스 유치가 실질적인 현지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선순환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해 싱글 패밀리오피스를 중심으로 인센티브 제도를 개편했다. 신청 서류 간소화, 보고 의무 완화, 승인 기간 단축, 적격 투자 범위 확대 등이 핵심이다. 세금 인센티브 처리 기간도 3개월 수준으로 단축했다. 자산 관리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금융 중심지 래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 근처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강정아 기자

이 같은 노력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영국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가 발표한 ‘가장 부유한 50대 도시 2025’에 따르면, 100만달러(약 14억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싱가포르 내 고액 자산가는 24만2400명으로, 10년 전 대비 62% 증가했다. 같은 기간 뉴욕은 45% 증가에 그쳤고, 런던은 브렉시트 영향으로 12% 감소했다. 홍콩의 증가율은 3%에 불과했다.

아시아 자산관리(WM)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해 온 홍콩의 위상 약화도 싱가포르 부상의 배경이다. 2020년대 들어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국가보안법과 강력한 방역 정책이 시행되면서 제도적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에 글로벌 자산가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싱가포르로 자산과 거점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중국 외식 기업 하이디라오 창업자인 장융 회장은 2018년 아내와 함께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하고, 패밀리오피스를 세웠다. 영국 가전 회사 다이슨의 창립자인 제임스 다이슨도 패밀리오피스를 운영 중이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와 함께 세계 3대 투자자로 꼽히는 짐 로저스는 앞서 2007년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이처럼 글로벌 자산가들이 싱가포르에 몰리는 현상은 단순한 절세 목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안정적인 제도와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 우수한 금융 인프라와 인재 풀 등이 맞물린 영향이다. 자산가들이 안심하고 부를 맡길 수 있는 ‘신뢰의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자산 관리 허브로 만든 원동력이다.

모르도르 인텔리전스는 “아시아·태평양은 자산 규모 기준 세계 2위 시장으로, 젊은 초고액자산가 기반과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활발한 신규 패밀리오피스 설립 활동을 통해 성장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