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밸류업 정책을 추진하고 상법 개정까지 이뤄지면서, 기업들이 주주 이익에 더 집중해야 하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행동주의 펀드들의 주주 제안이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안의 가결 여부를 떠나 주주권 행사 자체가 기업 가치 재평가의 강력한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12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 트러스톤자산운용은 KCC에 주주 서한을 보내 삼성물산 지분 유동화와 자사주 소각 등 주주 환원 정책 강화를 요구했다.
현재 KCC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 가치는 4조9000억원(10.1%)으로, KCC 자체 시가총액인 4조1000억원을 웃돈다. 트러스톤은 비효율적인 자산 배분을 지적하며, 지분 유동화 시 주주가치가 최대 78%까지 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트러스톤은 현재 KCC 지분 1.87%(16만6225주)를 확보한 상태다.
기업에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주주서한’뿐만 아니라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하는 ‘주주제안’도 활발하다. 행동주의펀드 얼라인파트너스는 DB손해보험의 주가가 지배주주 관련 내부거래가 만연하는 등 불투명한 기업 거버넌스 때문에 저평가되고 있다며 거래 감시기구 재설치 및 감사위원회 소속 사외이사 2인의 분리 선임을 주주 제안 형식으로 제출했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지난해 1월부터 DB손보 주식을 매입해 현재 약 1.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계 헤지펀드 팰리서캐피털도 LG화학에 LG에너지솔루션의 지분을 매각해 순자산가치(NAV) 할인율을 낮추고, 이를 통해 확보한 재원으로 자사주를 매입·소각하는 방식으로 자본 배분 정책을 변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팰리서캐피털은 현재 LG화학 지분 1% 이상을 장기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 서한 발송과 제안이 잇따르자 기업 가치 제고 기대감이 반영되며 관련 주가도 들썩이고 있다. KCC 주가는 주주서한이 발송된 11일 12%, DB손해보험은 주주제안이 공개된 6일부터 11일까지 11% 상승했다.
다만 주주 제안이 곧바로 안건 통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주주제안을 넣은 행동주의 펀드의 지분율은 1~2%에 불과하지만, 주총 일반 결의 사항은 발행주식 총수의 25% 이상이 출석한 가운데, 과반수 이상이 찬성해야 하며, 특별결의 사항은 33.3% 이상이 출석한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 자체만으로도 기업 경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평가한다. 주주제안이 주주총회에서 의결될 경우 경영 전반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데다, 설령 통과되지 않더라도 상법 개정 등 주주가치 제고 기조가 강화된 환경 속에서 경영진이 이를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남우 한국거버넌스포럼 회장은 “과거에 주주 제안이 실제 표결에서 이기는 사례는 적었다”면서도 “현재는 이사들이 주주의 이익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상법이 적용되는 첫 주주총회라 경영진이 안건을 보다 신중히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주 제안이 반영되지 않더라도 주주들의 적극적인 참여 자체가 기업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주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업 입장에서는 주주의 입장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일부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가 오히려 기업의 중장기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주주가치 제고라는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행동주의 펀드의 본질적인 목표는 단기간에 주가를 끌어올려 수익을 실현하는 데 있다”며 “이들의 제안이 실제 기업의 성장력 강화로 이어질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