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지연되는 틈을 타 기업들이 자사주를 서둘러 처분하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되고, 자사주를 활용할 때도 이사회가 아닌 주주총회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자사주 활용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러스트=챗GPT

3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한 달(1~26일) 유가증권 시장과 코스닥 시장에서 자기주식 처분결정을 공시한 기업은 71개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23건에 비해 209%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연간 자기주식 처분 결정 공시는 총 657건, 2024년에는 348건을 기록한 바 있다.

처분 목적별로 보면, 임직원 보상 목적이 40건으로 가장 많았다. 상여금 지급,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행사 등이 주를 이뤘다. DB하이텍은 지난 20일 자기주식 30만816주(약 258억원)를 종업원 상여 및 사내근로복지기금 출연에 활용한다고 공시했다. 로보티즈도 25일 자기주식 4만2000주(약 103억원)를 임직원 성과보상에 활용했다.

기업 자금 확보를 위한 자기주식 처분 사례도 9건에 달했다. 로보티즈는 자기주식 9만7646주(약 263억원)를 처분해 운영자금 확보에 나섰고, 아난티 역시 지난 14일 자기주식 200만주(약 152억원)를 활용해 신규 사업 투자 재원을 마련했다.

타법인 취득이나 전략적 제휴 강화를 위한 자사주 활용은 8건으로 집계됐다. 대웅은 자기주식 56만4745주(약 121억원)를 유투바이오 주식 취득에 현물출자했다. 회사 측은 “체외진단 서비스 및 의료 IT 솔루션 사업을 영위하는 유투바이오에 대한 전략적 투자”라고 설명했다. 금비도 자기주식 8만378주(약 40억원)를 활용해 무학과 주식 교환을 실시하며 사업 협력 관계를 강화했다.

자기주식을 교환 대상으로 하는 교환사채(EB) 발행 사례도 5건 나타났다. 교환사채는 일정 조건 하에서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사채로, 자기주식을 기초자산으로 사용할 경우 사실상 유상증자와 유사한 효과를 낸다. 아주스틸은 최근 자기주식 87만7820주(약 28억원)를 대상으로 교환사채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앞서 태광산업은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을 추진했다가 주주 권리 침해 논란이 제기되자 하루 만에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

◇3차 상법 개정되면 자사주 활용 문턱 높아져…기업들 소각 서둘러

3차 상법 개정안 논의가 지연되자, 기업들이 법 개정 이전 자사주 활용에 나서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회는 지난 21~22일로 예정됐던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연기하면서, 상임위 소위와 전체회의, 본회의를 거치는 입법 일정이 불투명해진 상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부 기업이 자사주를 서둘러 처분하거나 활용하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법 개정을 앞둔 꼼수 활용”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법 개정 이후에는 자사주 활용 시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개정 전에는 이사회 결의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3차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회사가 자기주식을 취득할 경우 1년 이내 소각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다만 임직원 보상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자사주 보유·활용을 허용하되, 이사회 결의가 아닌 주주총회 승인을 받도록 했다. 자사주 활용에 대해 보다 강한 주주 통제를 적용하겠다는 취지다.

◇“자사주 활용 자체가 문제 vs 자사주 전면 소각은 과도”

자사주 활용 자체를 문제삼는 시각도 있다. 이방우 한국거버넌스포럼 회장은 “회계 원칙과 글로벌 스탠다드상 자기주식은 회사가 매입하는 순간 자기자본에서 차감되는 계정으로, 자산으로 볼 수 없다”며 “이런 주식을 다시 팔거나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회사법과 미국 모범회사법(MBCA)은 금고주(treasury share) 개념을 인정하지 않아, 회사가 취득한 자기주식이 곧바로 미발행수권주식으로 복원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회사가 자사주를 매입하는 순간 해당 주식의 법적 존재가 사라져 사실상 소각된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반면 자사주 소각을 일률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해외에서도 자사주를 미발행주식으로 보더라도 반드시 소각을 의무화하기보다는, 자사주 처분 시 신규 주식 발행에 준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해 최대주주나 특수관계인의 우호 지분 확대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만을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자사주를 무조건 소각하기보다는, 경영권 방어 목적의 남용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기주식을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2011년 상법 개정 당시의 입법 취지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자사주를 일괄 소각할 경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회계학과 교수는 “자기주식 제도는 상법상 인정되는 대표적인 경영권 방어 수단인데, 한국은 경영권 공격 수단과 방어 수단 간의 불균형이 심각하다”며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려면 포이즌필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에 대한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