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업에 정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들의 가치가 왜 시장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지 이사회에서 치열하게 토론해봤느냐’고 물을 뿐입니다”
도쿄 주오구 니혼바시 도쿄증권거래소(TSE) 본사에서 만난 와타나베 고지 상장부장은 일본식 밸류업의 성공 비결을 ‘강제성 없는 압박’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거래소가 특정 지표를 윽박지르는 교관 노릇을 하기보다, 기업 스스로 자본 효율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인프라 구축에 집중했다는 설명이다.
TSE는 일본 최대 증권거래소로서 상장사의 진입과 퇴출, 지배구조 개선의 기준을 세우는 시장 설계자다. 특히 2023년 3월 프라임·스탠더드 시장 전체를 향해 타전한 ‘자본 효율성 개선’ 권고는 일본 증시의 체질을 뿌리부터 뒤흔든 대전환점이 됐다.
단순한 캠페인을 넘어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요청’으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PBR 1배 미만 기업들에게 자본 효율성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과 이행 시기를 공시하도록 압박하며 만성적인 저평가 국면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시도는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기준 TSE 프라임 시장 상장사의 91%가 거래소의 밸류업 요청에 응답해 공시를 완료했다. 2022년 1.1배 수준이던 프라임 시장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4배로 상승했으며, 만년 저평가에 시달리던 스탠더드 시장 역시 0.7배에서 0.9배로 올라서며 ‘PBR 1배’를 눈앞에 뒀다.
일본의 개혁 성공은 즉각적인 ‘아시아 자금 쏠림’으로 이어졌다. 이에 자극받은 대만 증권거래소(TWSE)가 기업 거버넌스 가이드를 대폭 강화하고, 한국 역시 ‘밸류업 지수’ 개발에 착수하는 등 아시아 증시 전반에 ‘자본 효율성 전쟁’을 촉발시킨 도화선이 됐다.
조선비즈는 이달 19일 일본에서 그를 만나 닛케이 5만시대를 연 도쿄 증시 개혁의 구체적 방법론을 들었다. 다음은 와타나베 고지 상장부장과의 일문일답.
― 2023년 3월 도쿄증권거래소가 제시한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요청’은 한국 시장에도 상당한 파급력을 미쳤다. 도입 배경이 무엇인가.
“사실 일본은 2015년부터 기업지배구조 코드를 통해 기업의 변화를 촉구해 왔다. 하지만 2022년 시장 구조를 프라임·스탠더드·그로스로 전면 개편한 뒤 실태를 분석해 보니 큰 문제점이 발견됐다. 기업들이 사외이사 선임 등 제도적 정비는 마쳤지만, 정작 자기자본이익률(ROE)이나 주가순자산비율(PBR) 같은 핵심 가치 지표는 여전히 낮았다. 형식적인 준수를 넘어, 경영진이 자본비용을 의식해 자원을 배분하는 실질적 실행 단계로 나아가야 한단 전문가들의 제언이 있었다”
― 구체적으로 기업에 무엇을 요구한 것인가.
“기업의 관점을 투자자의 기대와 밀접하게 일치시키라는 것이다. 단순히 숫자를 맞추라는 게 아니다. 경영진이 자본비용과 수익성을 고려해 연구개발(R&D), 인적자본, 설비투자 등에 자원을 적절히 배분함으로써 중장기적인 성장 기반을 구축하라는 요청이다. 이를 위해 거래소는 이사회 차원의 현황 분석, 구체적인 계획 수립, 투자자와의 건설적인 대화를 통한 실행 및 지속적 업데이트라는 3단계 프로세스를 제시했다”
― 특정 재무지표나 해법을 일률적으로 강제하지 않았다.
“모든 상장사에 통하는 단 하나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마다 성장 단계, 산업 구조, 재무 전략이 모두 다르다. 어떤 기업은 투자가 급선무고, 어떤 기업은 포트폴리오 재편이 먼저일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지표를 요구하는 대신 사고의 프레임워크를 던졌다. 기업이 스스로를 분석해 계획을 세우고 이를 투자자에게 설명하게 함으로써, 양측이 소통할 수 있는 공통 언어(Common Word)를 형성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 일각에선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 등 단기 환원에만 치중한다는 우려도 나오는데.
“오해다.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는 단기적인 수단일 뿐이다. 투자자들이 진정 기대하는 것은 자본비용을 상회하는 수익성을 지속적으로 달성해 기업 체질을 개선하는 경영이다. 성장 투자가 우선이고, 그 후 잉여 현금이 존재하고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가 합리적이라고 판단될 때 환원을 선택지로 검토하라는 것이 우리의 명확한 메시지다. 실제로 경영진이 자본비용과 주가를 인식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개선하고 투자를 확대한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 이번 개혁의 실질적 성과다”
― 법적 제재가 없는데도 일본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한 비결은 무엇인가.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일본 특유의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다. 거래소가 제시한 원칙 중심의 ‘따르거나 설명하라(Comply or Explain)’는 방식이 일본에서는 특히 효과를 냈다. 동종 기업 간 비교와 압력이 강한 상황에서, 밸류업에 소극적인 선택을 할 경우 그 이유를 공개적으로 설명해야 한단 점 자체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세를 거스르는 ‘다름’을 선택하는 비용이 커지면서, 다수 기업이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됐다. 여기에 일본 언론이 기업 가치 제고 노력을 긍정적으로 조명하며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오랜 디플레이션 국면을 벗어나 인플레이션 환경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성장 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와 사업 포트폴리오의 구조적 전환이 불가피해졌다. 기업들도 더 이상 현상 유지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서, 자발적으로 성장 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변화가 이번 개혁을 움직인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한 중견기업은 밸류업 공시 참여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기업들이 각자의 상황에 맞춰 대응할 수 있도록 방대한 참고 자료를 제공하는 데 공을 들였다. 대표적인 것이 400명 이상의 투자자 피드백을 분석해 만든 ‘우수 사례집(Good Case Studies)’이다. 2024년 2월 처음 공개한 뒤 반응이 좋아 같은 해 11월 55개 사례로 확대했고, 12월에는 스탠다드 시장 기업 13곳을 포함해 33개 실명 사례를 추가로 공개했다.
또 자본비용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높였는지, 이사회와 경영진의 행동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냈는지, 자본비용 개념을 활용해 투자 의사결정과 자본 배분을 어떻게 개선했는지를 다룬 심층 사례 6건도 제시했다.
동시에 부정적 사례도 제시했다. ‘기업과 투자자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 사례(Misalignment)’ 자료다. 이를 통해 기업들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명확히 제시했는데, 상장사 관심이 특히 컸다.
이와 함께 이와나가 모리유키 (Iwanaga Moriyuki) TSE 사장이 직접 일본 전역을 돌며 중소·중견기업 경영진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어 정책 취지를 알렸다. 자본비용 개념조차 낯선 기업들을 위해 무료 온라인 학습 자료도 상시 제공하고 있다”
― 아베 내각부터 10년 넘게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베 총리 이후 역대 정권 모두 일본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해선 민간 부문의 성장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은 일관되게 이어졌고 이것이 밸류업 정책이 중단 없이 추진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금융청(JFSA)이 자본 흐름의 큰 틀을 설계하고, 일본 공적연금(GPIF)은 장기 투자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 거래소는 제도와 인프라를 구축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부·연기금·거래소가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정렬된 ‘올 재팬(All Japan)’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 일본 밸류업의 힘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