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보유 자사주를 미국주식예탁증서(ADR)로 발행하는 방안을 검토하자, 이를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우회하려는 시도로 보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업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ADR 발행 효과가 크지 않은 데다 소각될 자사주가 미국 증시에 풀리면서, 결국 꼼수 자본 조달이란 지적이다.
지난 10일 SK하이닉스는 “자기주식을 활용한 미국 증시 상장 등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공시하며 사실상 ADR 발행 준비를 인정했다. 이후 하이닉스는 공시 당일에만 3% 이상 주가가 급등했다.
ADR은 미국 예탁기관이 해외 기업 주식을 보관한 뒤 이를 기초로 예탁증서를 발행해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제도다. 달러로 거래할 수 있어 사실상 미국 상장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하이닉스가 ADR 상장을 검토하는 표면적 이유는 경쟁사 대비 저평가 상태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현재 주가수익비율(PER)은 약 11배로, 미국 마이크론(34배)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내년 예상 주가순자산비율(PBR) 역시 SK하이닉스가 2.1배로, 마이크론(3.2배) 대비 낮아 밸류에이션 차이가 크단 지적이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ADR을 발행 시 마이크론과의 밸류에이션(평가가치) 차이를 단숨에 좁힐 것”이라며 “투자자들의 롱숏 전략뿐만 아니라, 나스닥과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 추종 펀드들의 수급 유입도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움직임을 자사주 규제 회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은 자사주를 최소 1년 이내 소각하도록 의무화하지만 ADR 발행에 대해서는 별도 규정이 없다.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소각됐어야 할 자사주가 ADR 형태로 미국 시장에 유통되면서 주주가 기대할 수 있는 주당순이익(EPS) 개선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자본시장업계 관계자는 “소각 의무화 직전 자사주를 해외로 빼돌리는 것은 편법적 설계에 가깝다”며 “기업가치 제고가 목적이라면 일반적으로 소각이 우선돼야 하는데 ADR로 자사주가 유통 주식이 되면서 소각 대비 주주환원 효과가 희석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 성공 사례로 꼽히는 대만 TSMC도 자사주가 아니라 보통주를 활용해 ADR을 발행했다. TSMC는 1997년 미국 증시에 상장한 뒤 글로벌 투자자들이 현지 경쟁사와 유사한 밸류에이션을 적용하면서 프리미엄이 붙었고, 이는 본주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초기 발행주식총수의 2~3% 수준이던 ADR 물량도 약 20%까지 확대하며 거래량을 확보했다.
업계 관계자는 “ADR 효과를 기대한다면 굳이 소각 대상인 자사주를 활용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자사주 규모도 한계로 꼽힌다. SK하이닉스가 활용 가능한 자사주는 발행주식총수의 약 2.4%(약 10조원) 수준에 불과해 미국 시장에서 유의미한 거래량을 확보하기 어렵단 지적이 나온다. 사실상 ‘보여 주기 식 ADR’에 그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미국 증시에서 10조원 규모는 사실상 스몰캡으로 분류돼 글로벌 펀드 유입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TSMC는 ADR 하루 거래량만 5조원에 달한다. 현재 SK하이닉스 자사주 물량으로는 의미가 없고, 차라리 10조원 자사주를 소각한 뒤 20조~30조원 규모로 추가 매입해 ADR을 발행하는 방식이 진짜 밸류업을 위한 방법일 것”이라고 했다.
ADR의 주요 명분인 ‘외국인 투자자 접근성 개선’ 역시 설득력이 낮다. 내년부터 외국인이 국내 증권사 계좌를 만들지 않고도 국내 주식을 직접 거래할 수 있는 ‘외국인 통합계좌 제도’가 시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접근 장벽이 낮아지는 만큼, ADR 발행의 실효성을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법안 논의에 참여한 관계자는 “소각 대신 ADR로 외부에 자사주를 처분할 경우 일반 주주에게 불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며 “관련 내용을 법안에 어떻게 반영할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