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뉴스1

이 기사는 2025년 12월 7일 09시 59분 조선비즈 머니무브(MM) 사이트에 표출됐습니다.

상장사들이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를 넉 달가량 앞두고 경영권 방어 준비에 착수했다. 특히 자산규모가 2조원 이상인 경우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돼 소수주주가 적은 지분으로도 이사회에 진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사들의 임기 만료 시기를 각기 달리 설정해 경영권 분쟁에 대비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수가 있다. ‘큰손’ 국민연금이 이에 대해 일관적으로 반대표를 행사했던 전력이 있다. 시차임기제를 도입하려면 정관을 변경해야 하는데, 국민연금의 반대로 인해 시차임기제 도입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정관 변경에는 성공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국민연금에 ‘찍혀’ 연금이 소수주주의 이사 선임안에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집중투표제 대비해 ‘시차임기제’ 도입 급부상

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시차임기제를 도입해 경영권 방어를 준비하려는 기업이 늘고 있다.

시차임기제란 이사들의 임기를 분산해 이사회에 공석이 한번에 많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이다. 가령 이사회 정원이 5명이라면, 이들의 임기가 동시에 만료돼 5개의 공석이 한꺼번에 나올 경우 소수주주가 원하는 인사가 이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지난 8월 제2차 상법 개정으로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됨에 따라,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대규모 상장회사 소수주주는 갖고 있는 주식 1주에 선임할 이사 수를 곱한 만큼 의결권을 갖게 됐다. 뽑을 이사의 수가 늘어날수록 소수주주들이 원하는 이사가 선출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 구조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2차 상법 개정안 공포 후 1년이 경과한 내년 8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에 내년 3월 정기주총에 바로 적용되지 않는다. 사실상 2027년 정기주총부터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시행될 예정이다. 따라서 기업 입장에서는 미리 정관을 개정해 그다음 주총에 대비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기업이 집중투표제에 대비하는 방법은 이사들의 임기가 한꺼번에 끝나지 않고 각자 시차를 두도록 이사회 구성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다만 이미 선임돼 활동 중인 이사에게 중도 퇴임을 권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대안으로 내놓는 방안이 회사 정관을 고치는 것이다.

정관 내용을 ‘이사 임기는 3년으로 한다’에서 ‘이사 임기는 3년 이내로 한다’로 개정하면, 사외이사 선임 시 임기를 제각기 달리 설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는 3년, B는 2년, C는 1년의 임기로 선임하면 이들의 임기가 동시에 만료되지 않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선 경영권을 방어할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정관 변경을 위해서는 주주총회 특별결의(67% 이상 찬성)를 통과해야 한다.

◇ 삼성화재·삼성카드·크래프톤도 시도했지만...

시차임기제의 관건은 국민연금의 찬반 여부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기업의 시차임기제 도입 시도가 있을 때마다 거의 반대표를 행사해 왔다.

가장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는 삼성화재다. 삼성화재는 지난 3월 정기주총에서 이사 임기를 다변화하겠다며 ‘이사 임기를 3년 이내로 한다’는 내용으로 정관을 변경하려 했으나, 국민연금은 반대표를 던졌다. 다만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안건은 통과됐다.

올해 삼성카드 정기주총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었으나 국민연금은 반대했다. 그 외에 크래프톤, LS에코에너지, 한국콜마, 콜마홀딩스, 가온전선, 태영건설, 에코프로머티리얼즈 등의 주총에서도 이런 정관 변경 안건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사실상 소수주주 쪽 손을 들어준 셈이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원회는 일관적으로 ‘(기업이) 정당한 사유 없이 사외이사의 임기를 단축하거나 연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고 밝혀왔다. 이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지침 중 ‘국내주식 의결권 행사 세부기준’ 16조에 의거한다.

국민연금은 기본적으로 시차임기제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같은 세부기준 15조는 “시차임기제의 폐지에 찬성하고, 시차임기제의 도입에 반대한다”며 “다만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달리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정당한 사유’가 있을 시 사외이사 임기 변경 및 시차임기제 도입에 찬성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몇 가지 예외적인 상황에 시차임기제에 찬성표를 던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민연금 수책위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 한 대학 교수는 “여성 사외이사를 넣기 위해 기존 이사회의 임기를 조정하거나, 혹은 회사가 분할돼 이사회 정원을 줄여야 하는 경우엔 국민연금이 찬성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자본시장 전문 변호사는 “반면 회사가 경영권 분쟁이나 주주제안,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고 있거나 ‘회사의 경영상 필요’ 같은 두루뭉술한 문구만 적어놓고 구체적인 사정은 명시하지 않는 경우, 국민연금은 단순히 경영권 방어 용도라고 판단해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