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뜨거운 감자’였던 은행의 자체 담보 감정평가를 둘러싼 은행과 감정평가업계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은행은 명확한 시세가 있는 담보 물건에 대해 자체 산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감정평가업계는 위법이자 편법대출 위험이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한국감정평가사협회는 최근 이례적으로 보도 설명자료를 내고 금융위원회가 담보물의 외부 감정평가 의무화 논의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한다는 보도에 대해 “위법 사안을 재논의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반발했다. 이어 “현재까지 금융위로부터 참여 제안을 받은 바 없다”고 덧붙였다.
감정평가사협회는 참여 요청이 오더라도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미 정부가 관련 행위에 대해 위법이라는 유권해석을 한 상황에서 위법 당사자인 은행이 참여한 TF가 이를 다시 논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다. 국토교통부는 앞서 지난달 19일 은행이 감정평가사를 고용해 담보물을 직접 평가하는 것은 감정평가법상 ‘감정평가’에 해당하며, 감정평가법 제5조 제2항을 위반한 것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국정감사에서 단골로 거론되는 ‘은행권의 담보물 자체평가’는 해묵은 갈등 요인이다. 금융기관은 대출 시 담보물에 대한 가치를 매기기 위해 감정평가를 진행한다. 이때 외부 감정평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감정평가사를 고용해 담보물 가치를 산정하기도 한다. 한국부동산연구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금융기관의 자체 산정 비중은 68%에 달한다.
감정평가법 제5조 2항에 따르면 금융기관·보험회사·신탁회사 또는 그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이 대출, 자산의 매입·매각·관리,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에 따른 재무제표 작성을 포함한 기업의 재무제표 작성 등과 관련해 토지 등의 감정평가를 하려는 경우에는 감정평가법인 등에 의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유권해석에 이어 국감 시즌이 다가오면서 감정평가사들은 공세 수위를 높이는 모습이다. 지난달 29일 한국감정평가사협회는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신관 앞에서 ‘국민은행 고용 감정평가사 통한 감정평가시장 불법 침탈 행위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국민은행이) 비용 절감을 위해 고가 물건 위주로 선택적으로 평가하고, 평균 120억원의 고액 부동산을 단 하루 만에 졸속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감정평가사협회에 따르면 국민은행의 자체 감정평가액은 2022년 26조원, 2023년 50조원, 2024년 75조원으로 3년 만에 세 배 가까이 늘었다. 국민은행의 자체평가 실적은 감정평가수수료 기준으로 550억원인데, 이는 감정평가법인 중 담보 평가 실적이 가장 많은 법인(350억원)보다 200억원 많은 규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은행에 소속된 감정평가사는 어쩔 수 없이 대출 실적 압박 등에서 벗어날 수 없어 담보 가치를 높게 평가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심지어 은행은 자체 평가 물건으론 고액부동산을 선택하고, 외부 감정평가법인엔 보수가 낮고 평가가 복잡한 물건을 넘겨 업계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했다.
국민은행을 비롯한 은행권은 대출 실행을 위한 담보의 가치를 산정하는 절차의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무조건 외부에 감정평가를 맡기게 하면 결국 그 비용이 고객 대출금리 등으로 전가될 수 있다”면서 “고객의 의사에 따라 외부 감정평가법인 의뢰나 자체 평가 중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