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의 64년 투자 단짝이자 사업 동반자였던 찰리 멍거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이 28일(현지 시각) 99세 나이로 별세했다.
버핏이 회장으로 있는 투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는 이날 “멍거 부회장의 가족에게서 그가 오늘 아침 캘리포니아의 병원에서 평화롭게 영면했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밝혔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논란이 됐던 버핏의 선행 매매 의혹에 대해 멍거는 “그가 자신을 위해 매우 사악한 일을 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며 옹호했기에 갑작스러운 멍거의 죽음에 세계 금융계는 충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멍거와 버핏은 같은 네브래스카주(州) 오마하 출신으로 사는 집도 멀지 않았다. 출생은 멍거가 버핏보다 6년 빠른 1924년으로 형이었다. 멍거는 어린 시절 버핏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료품점에서 토요일마다 일했지만 당시 버핏과 서로 알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멍거는 독일계 집안에서 판사인 할아버지와 변호사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가 됐다. 부동산 변호사로 일하던 35세에 지인 소개로 버핏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 서로의 투자 철학에 매료됐다. 1965년 41세였던 멍거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전문 투자자가 됐고, 1978년 버크셔해서웨이 부회장을 맡았다.
둘은 세계 투자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특히 매년 오마하에서 열리는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두 사람이 강연하는 현장은 세계 투자자들에게 ‘꿈의 무대’와 같았다. 이 강단에서도 버핏은 질문에 답할 때마다 멍거를 쳐다보며 의견을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버핏은 평소 찰리 멍거를 “나의 스승”이라 불렀고, “말은 찰리가 하고 나는 입을 벙긋댈 뿐”이라 할 정도로 인정했다.
버핏이 언론 등에서 화려하게 주목받았다면, 멍거는 그림자처럼 그 옆을 지켰다. “질투는 미친 짓이다. 100% 파멸을 부른다”며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버핏(1180억달러·152조원)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그 역시 투자로 23억달러(약 3조원)의 재산을 모았다.
둘의 우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버핏과 멍거는 매일 몇 시간씩 전화 통화를 했다. 버핏은 고향인 오마하에, 멍거는 LA에 사무실을 뒀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람은 한 번도 논쟁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의견이 충돌하면 멍거는 “워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똑똑하지만 제가 옳거든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생전 기술 기업에 문외한이었던 버핏을 설득해 애플과 중국 최대 전기차 업체 비야디(BYD)에 투자하도록 한 일화로 유명하다.
온화한 버핏과 달리 멍거의 말은 직설적이었다. 가상 화폐를 ‘쥐약’ ‘멍청한 도박’으로 표현하며 규제를 외쳤고,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도 실패할 것으로 봤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작년 “2009년 멍거와 만난 뒤 난 매우 슬펐다”고 회상했다. 그의 말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멍거리즘(멍거주의)’으로 불릴 정도로 회자됐다. “주식시장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돈을 현명한 사람들에게 옮기는 장소”라며 독서광답게 끊임없이 공부할 것을 강조했다. “투자란 몇몇 훌륭한 회사를 찾아내 그저 엉덩이를 붙이고 눌러앉아 있는 것”이라며 인내를 요구하기도 했다.
멍거는 최근 들어 거의 앞을 보지 못하고 걷지 못했다. 첫 결혼에 실패했고, 첫 아들도 백혈병으로 떠나보내는 등 아픔을 겪었지만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2016년 지인이 “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두 번째 아내의 첫 번째 남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저 그보다 조금 덜 끔찍한 남편이었을 뿐인데 60여 년 동안 이 훌륭한 여인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버핏은 성명을 통해 “찰리의 영감과 지혜, 참여가 없었다면 버크셔해서웨이는 현재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며 평생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