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중국 출장을 갔을 때, 베이징에서 시안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적이 있다. 이륙을 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창문 너머로 광활한 평야가 보였다. ‘저기가 중원(中原)이구나’ 생각한 순간, 수많은 군마(軍馬)들이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두두두’ 하고 달려가는 환영이 보였다. 적장과 일합을 겨루는 장수들의 기합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삼국지 마니아’의 가슴이 뛰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삼국지를 처음 읽었다. ‘정음사’에서 나온 세 권짜리로, 아버지가 물려주신 책이다. 이후 학창 시절 틈날 때마다 십여 차례 거듭해 읽었다. 용맹한 장수부터 지략을 쓰는 모사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풍운처럼 등장했다 스러지는 웅장한 스케일이 맘에 들었다. 반복해 읽다 보니, 지금은 줄거리 상당 부분이 머리 안에 있다. 삼국지는 나에게 단순한 소설 이상이다.
많은 경영 서적이 ‘현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삼국지만큼 그것을 실감나게 가르쳐주는 책도 없다. 내가 즐겨 읽는 적벽대전의 한 대목이다. 조조가 오군에게 패해 도망치면서도 부하들의 사기를 위해 짐짓 웃으며 “내가 적장이라면 이곳에 군사를 배치했을 텐데”라고 했다. 그러자 제갈량이 숨겨놓은 매복군이 조조를 습격했다. 세 번이나 연속으로 그랬다. 제갈량은 어떻게 조조가 퇴각할 곳을 예측했겠나. 현장을 미리 답사했던 것이다.
이는 은행 업무에도 적용된다. 내가 농협은행에서 여신팀장을 할 때다. 한 고객이 김포 부근의 땅을 담보로 대출을 신청했다. 서류상으론 아파트 부지로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 나가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지역 뒷산 너머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평가가치에 부정적인 요소였다. 또 근처 김포공항에 오고 가는 비행기들이 바로 그 지역을 지나 소음이 심했다. 아파트 분양에 부정적인 요인이 보였고, 결국 대출을 거절했다. 현장을 가보지 않았다면, 책상머리에선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삼국지는 의리도 가르친다. 의리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다. 관우는 조조에게 생포된 후 갖은 금은보화에도 혹하지 않고 주군인 유비를 찾아 떠난다. 군신 관계는 아니지만, 나도 고객을 대할 때 이를 닮으려 한다.
삼국지에선 주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호걸들이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벌인다. 낯선 땅에서 적을 만나 어떤 전략을 세우느냐가 관건이다. 조조는 만기총람형, 유비는 권한위임형으로 각자 통치 스타일은 달랐다. 그러나 공통점은 용맹한 장수와 지혜로운 책사를 얼마나 많이 등용했는지, 그리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는지가 성공과 실패를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은행에서 여신, 인사 등 새로운 업무를 수행할 때마다 삼국지에서 영토를 개척하는 장수처럼 임했다. 올해 자산 운용 대표를 맡고부터는 자본시장에서 영토 확장이라는 임무에 설렌다. 고객 신뢰로 성장하는 ‘초일류 금융’은 내게 삼국지의 많은 군웅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대의명분이다. 자본시장의 영웅호걸들과 함께 천하 통일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