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기업들이 시장에서 사들인 자사주를 의무 소각하도록 하는 방안 등을 추진하고 있어 시장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금융 당국은 올 초 대통령 업무보고 등을 통해 주주 환원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자사주 관련 규제 강화를 천명하고, 연내 최종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 5일에는 자사주 제도 개선 세미나를 열고 의견을 수렴했다. 하지만 재계는 자사주 소각을 강제할 경우, 경영권 방어를 위한 주요 수단이 사라지면서 투기 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러스트=김현국
그래픽=김현국

◇“지배력 강화 수단 전락한 자사주”

자본시장에서 자사주 문제가 불거진 것은 국내 기업들이 자사주를 지배력을 강화하고, 사적 이익을 늘리는 방향으로 편법 운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자사주 매입은 주가 조작 우려 때문에 원래 금지돼 있었다. 하지만 2011년 상법 개정으로 허용됐다.

당시 정부가 자사주를 살 수 있게 해준 명분은 주주 환원 강화였다. 기업이 이익잉여금으로 회사 주식을 장내에서 사들인 뒤, 이를 없애면 자본금 변화 등은 없고 발행 주식 총수를 줄이기 때문에 주당순이익을 증가시킨다. 주식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등 선진국 기업은 자사주 매입 후 소각을 배당보다 주가 부양 및 안정 효과가 큰 주주 환원 정책이라고 보고 이를 적극 활용한다. 한국투자증권은 국내 상장사들이 3년에 걸쳐 보유한 자사주를 모두 소각하면 코스피가 3620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기업은 자사주를 이러한 용도로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 금융 당국과 소액 주주들의 입장이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제한되기 때문에 기업은 자사주 매입을 통해 의결권을 가진 주식수를 줄임으로써 지배주주 보유 지분의 의결권을 상대적으로 강화시킨다. 또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갖고 있다가 지배주주에 우호적인 세력에 팔아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지난해 9월 KT와 현대차, 현대모비스가 자사주를 맞교환해 의결권을 부활시킨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이라는 편법으로 본래 의결권이 없던 자사주가 지주회사 전환 뒤 의결권이 생겨나 총수 일가 지분의 우호 지분 역할을 하는 것도 허점으로 지적된다. 지난 5일 자사주 제도 개선 관련 세미나에서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자사주의 마법이나 의결권 부활을 초래할 수 있는 지분 맞교환 등은 편법 지배력 강화에 해당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 당국의 의지”라고 말했다.

◇재계, “경영권 위협, 주가 폭락 우려”

이에 전문가들은 자사주를 본래 취지에 맞게 소각을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자사주 매입 후 소각 의무화, 인적분할 시 자사주에 대한 신주 배정 금지 같은 주주 친화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며 “이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며, 배당 성향을 높이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는 해법”이라고 말했다. 실제 독일에선 일정 규모 이상으로 취득한 자사주는 소각 또는 매각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 일본과 미국의 일부 주(州)와 같이 자사주 취득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하는 경우에도 인적분할 시 신주 배정과 같은 권리는 엄격히 금지한다.

하지만 재계는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할 경우, 큰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기업이 자사주를 대거 주식시장에 풀 경우 주가가 폭락하고, 경영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 필)이나 차등의결권 등이 국내 기업에 허용되지 않아 자사주가 그간 거의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었다”며 “자사주 소각이 강제되면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위협이 더욱 빈번해질 것”이라고 했다.

자사주 강제 소각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사주 관련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경영학계와 투자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기업이 자사주를 취득할 경우 그 목적을 보다 상세히 밝히는 등 공시 요건을 강화하고, 기업이 자사주를 처분할 땐 신주(新株) 발행 같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영미권에선 자사주 처분을 신주 발행과 동일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기업이 자사주를 보유하고 활용할 실익이 크지 않아서 자사주 논쟁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