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高)금리 기조가 길어지고, 경기 둔화 조짐이 나타나면서 국내 은행들의 연체율이 조금씩 상승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절대적 연체율 수준이 아직 낮은데다 향후 부실에 대비해 충당금도 충분히 쌓고 있어서 당장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향후 금리 인하가 이뤄지지 않고, 경기 침체 폭이 커질수록 은행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월말 기준 국내은행의 원화대출 연체율(1개월 이상 원리금 연체기준)이 0.36%를 기록했다고 25일 밝혔다. 지난 1월말(0.31%)보다 0.05%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지난해 2월말(0.25%)과 비교하면 0.11%포인트 상승했다. 2020년 8월(0.38%) 이후 2년 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연체율이다. 2월 중 원화대출 연체율 변동폭(전월말 대비)은 2020~2022년 계속 0.02%포인트에 머물렀으나 올해 들어서는 0.05%포인트로 벌어진 상태다.
지난 2월 중 신규 연체 발생액은 전월과 비슷한 1조9000억원 수준이었다. 전월 대출잔액 대비 신규 연체 발생 비율은 0.09%로 지난해 2월(0.05%)보다 0.04%포인트 증가했다. 신규 연체율은 지난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일곱 차례에 걸쳐 올리면서 꾸준히 오르고 있다.
차주(借主) 유형 별로 살펴보면 지난 2월 기업·가계대출 연체율은 각각 0.39%, 0.32%를 기록했다. 1월말보다 각각 0.05%포인트, 0.04%포인트 상승했다. 기업 중에서도 중소기업 연체율 상승폭이 0.08%포인트(0.39%→0.47%)로 컸다. 대기업 연체율은 1월과 2월 모두 0.09%였다. 가계대출의 경우, 주택담보대출 연체율(0.2%)보다 신용대출 등 주택담보대출을 제외한 가계대출의 연체율(0.64%)이 3배 이상 높았다. 신용대출 등의 연체율은 전월 대비 증가폭도 0.09%포인트로 주택담보대출 연체율 증가폭(0.02%포인트)보다 훨씬 높았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용대출은 금리가 더 높고, 차주의 경제 여건 변동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연체율이 더 높고, 경기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월을 기준으로 지난 3년(2020~2023년)간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0.21%에서 0.20%로 큰 변화가 없었으나 가계신용대출 등의 연체율은 같은 기간 0.51%에서 0.64%로 0.13%포인트 증가했다.
국내은행들의 연체율은 3~4%대를 넘었던 2008년 금융위기나 1997년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해 매우 안정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일부 ‘착시’에 따른 연체율 조정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최근 3년간(2020∼2022년) 만기연장·상환유예 조치를 적용받은 소상공인 등의 대출이 연체·부도율 등 지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은 부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숨은 부실이 한꺼번에 터질 경우, 은행의 건전성은 크게 악화하고 ‘뱅크런’ 등의 혼돈이 빚어질 수 있다. 또한 물가가 잡히지 않으면서 금리를 낮추기 어려운 여건이 지속되고, 하반기 수출 개선이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을 경우 경기 부진으로 기업과 가계의 상환 여력이 크게 악화할 수 있어 유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정부와 금융 당국은 은행에 선제적인 충당금 확보를 적극 주문하고 있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과 주요 금융지주사는 1분기 실적에 반영할 충당금을 당초 계획보다 크게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5대 금융지주와 은행은 지난해 각각 5조9368억원, 3조2342억원의 대손충당금을 새로 적립했다. 5대 금융지주와 은행의 지난해 말 기준 충당금 잔액은 각 13조7608억원, 8조7024억원에 이른다. 올해 1분기 충당금이 지난해 같은 기간의 2배 정도로 증가할 경우, 금융지주에서는 최소 약 1조6000억원, 은행에서는 약 6000억원이 추가된다. 한 시중은행 리스크 관리 담당 임원은 “숨은 부실이나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향후 경기 침체 등의 우려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고, 연체율을 비롯해 충당금 관리도 철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