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인 1300원을 넘어선 지 한 달여, 그런데 국내 주식시장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통상 원화 약세 시기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증시에서 발을 빼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치곤 한다. 달러 강세-원화 약세 국면이 되면 외국인 투자자들 입장에선 가만히 앉아서 달러로 환산한 투자 수익률이 하락하는 꼴이어서, 환차손이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한국 주식을 팔고 달러를 챙겨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기색이 없다. 오히려 개인과 기관투자자들이 주식을 순매도(매수보다 매도가 많은 것)하는 와중에 나 홀로 순매수하며 시장을 떠받치고 있다. 그것도 조(兆) 단위다. 외국인들은 어떤 이유로 한국 주식을 사고 있고, 어떤 종목들을 담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환율 높은데 주식 사는 외국인들
2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외국인 투자자들은 코스피 시장에서 3조8000억원 가까이 순매수했다. 이 기간 개인은 1조4200억원, 기관은 2조4800억원 넘는 순매도를 기록한 것과 정반대 행보다.
전문가들은 최근 원화 약세가 우리나라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유럽과 중국 등 주요국 경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유로화나 위안화 대비 달러가 나 홀로 초강세가 됐고, 그 결과 원화가 약세로 방향을 튼 것이지 원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5일 금통위 정례회의 후 기자간담회에서 “환율 상승이 외환시장 유동성 문제나 신용도 문제, 외환보유액 부족 등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달러 강세와 함께 다른 국가의 환율이 같이 움직이는 상황”이라고 했다.
금융감독원의 최신 통계인 7월 국가별(외국인) 주식 순매수 집계치를 보면 1위는 미국계 자금이었다. 이들은 지난달 한국 주식 1조7300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그다음으로 싱가포르(3850억원), 일본(1680억원) 등 순이었다.
6월에는 노르웨이·싱가포르 같은 국가가 한국 주식을 많이 샀는데, 7월에는 미국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미국은 외국인 중 우리나라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외국인 주식투자 중 미국 비중 41.2%)하고 있는 나라인 동시에 노르웨이·싱가포르 등과 함께 연기금과 펀드 같은 장기성 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에 속한다. 김후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신흥국 관련 주식 펀드에서 저평가 매력이 생긴 우리나라 주식 비중을 늘린 것으로 파악된다”며 “이는 외국인 수급에 긍정적 신호”라고 분석했다.
◇한국 제조업이 신냉전 수혜?
외국인들은 한 달 사이 LG에너지솔루션·현대차·삼성SDI·현대모비스 등 국내 반도체·2차전지 관련 대기업 주식을 집중적으로 쇼핑했다. 동시에 네이버와 SK텔레콤, 하나금융지주 등 그간 사모았던 성장주와 경기방어주는 내다 팔았다.
외국인 순매수 리스트에서 보듯, 한국 제조업이 미·중 신(新)냉전 시대에 반사이익을 보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있다. 나정환 케이프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은 중국에서 생산된 소재와 부품을 배제하는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은 한국의 배터리 3사 정도”라며 “LG엔솔의 경우, 외국인이 7월 말부터 22영업일 연속 순매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도체와 2차전지, 전자기기 등 첨단 기술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일 경우 한국을 포함한 베트남 등 일부 아시아 국가들이 수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이웅찬 하이투자증권 연구원도 “2015년부터 사드 보복과 2018년 G2(주요 2개국) 무역분쟁 등을 계기로 공급망을 정리하던 와중에, 최근 신냉전으로 프렌드쇼어링(미국이 동맹·우방국과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 혜택을 받고 있다”며 “칩4 동맹 일원으로서 우리나라가 서방세계에서 첨단 제조업의 일부를 담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달러화 강세 폭이 얼마나 더 커질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경기 침체 깊이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언제든 변덕을 부릴 가능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