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강도 높고 직접적인 대출 규제로 은행의 가계 대출 증가세를 일단 꺾었지만, 올 상반기 19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이는 가계 부채 시한폭탄은 여전히 심지가 타들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12월 은행권 가계 대출은 전달보다 2000억원 감소했다. 공모주 청약 관련 대출 상환이 급증한 특수 상황이었던 작년 5월(-1조7000억원 )이후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줄어들었다. 12월 가계 대출이 줄어든 것은 17년 만이다.
하지만 미국의 조기 금리 인상 가능성이 높아지고, 한국은행의 기준 금리 인상에 속도가 붙어 이자 부담이 커지는 상황이라 가계 빚에 대한 우려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계 부채가 안정화에 들어선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박성진 한은 금융시장국 차장은 “금융 당국의 강력한 대출 총량 관리 효과가 나타났지만, 여전히 가계 대출 수요가 높아서 증가세에서 감소세로 추세적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중국의 경기 둔화, 미·중 갈등 악화 등도 금융 불안 요소로 꼽힌다. 이날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회색 코뿔소로 비유되던 잠재 위험들이 하나둘씩 현실화하고 있다. 멀리 있던 회색 코뿔소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풍선 효과’로 2금융권 가계 대출 폭증
이날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은행 가계 대출과 함께 상호금융·저축은행·보험사·여신전문금융사 등 제2금융권까지 포함한 ‘가계 대출 동향’을 발표했다. 은행과 제2금융권의 가계 대출은 지난달 2000억원 늘었다. 증가 폭이 11월(5조9000억원)보다 크게 줄었다. 주택담보 대출이 2조6000억원 증가한 반면 신용 대출 등 기타 대출은 2조4000억원 감소했다.
하지만 이는 작년 9월 이후 일부 은행들이 가계 대출 취급을 중단하는 등 강도 높게 가계 대출 증가세를 관리한 영향이다. 지난 한 해를 기준으로 보면 은행과 제2금융권 가계 대출은 107조5000억원 늘었다. 2020년(112조3000억원)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2019년(56조2000억원)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무엇보다 2021년에는 제2금융권 대출이 폭증하는 ‘풍선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은행권 가계 대출 증가액은 2020년 100조7000억원에서 2021년 71조76000억원으로 줄었다. 하지만 농·수·축협, 새마을금고, 신협 등 상호금융사는 2020년에는 가계 대출이 1000억원 감소했지만, 2021년에는 19조5000억원 늘었다. 보험사 가계 대출 증가액도 1조7000억원(2020년)에서 5조4000억원(2021년), 저축은행도 같은 기간 5조5000억원에서 6조3000억원으로 증가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는 고신용자들이 상호금융권으로 몰려가면서 지난해 2월부터 제2금융권인 상호금융권 대출 금리가 은행 대출 금리보다 낮아졌고, 그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금융위원장 “회색 코뿔소가 다가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한 가운데, 증가한 부채가 부동산·주식·가상화폐 등으로 유입됐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자산의 가격 변동성이 커지고, 금리 인상 등으로 가계의 이자 부담도 커져 금융 불균형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경제·금융 전문가 간담회’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자산 매입 축소(테이퍼링) 가속화와 코로나 상황, 중국 경기 둔화, 미·중 갈등 이슈가 올해 한국 경제와 금융 시장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전문가들도 우려를 표했다. 한상춘 미래에셋증권 부사장은 “글로벌 긴축 기조가 가속화되면서 충격도 현실화할 것”이라며 “한국은 가계 부채의 규모와 질이 취약하므로 금리 인상에 따른 부채발(發) 리스크 전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색 코뿔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쉽게 간과하는 위험 요인. 몸집이 큰 코뿔소는 멀리 있어도 눈에 잘 띄지만 평소에 대비를 하지 않으면 막상 다가올 경우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해 큰 위험에 빠진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