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사 10곳 중 7곳은 호봉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호봉제는 업무능력이나 직무와 관계없이 연차만 채우면 높은 연봉을 받은 임금 체계인데, 열심히 일할 동기 부여를 하지 못하는 낡은 시스템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0년간 호봉제를 운용하던 국내 기업의 절반 이상이 임금 체계를 연봉제 등으로 뜯어고쳤지만, 금융권은 여전히 호봉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최근 10년간 전체 업종의 호봉제 비율이 39.9%(2011년)에서 13.7%(2021년)로 급감했지만, 금융업종만 2011년(66%) 이후 70% 전후를 유지하고 있다.
26일 고용노동부의 임금직무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금융업 사업체 3만8427곳 가운데 호봉제를 도입하고 있는 곳은 68.6%(2만6360곳)에 달했다. 1년 전인 지난해 6월(66.3%)보다 2.3%포인트 늘어났다. 사업체 숫자는 은행의 경우 지점을 하나의 사업체로 계산하는 방식이다. 보험업의 경우 대리점 등도 하나의 사업장으로 친다.
국내 전체 업종의 호봉제 비율은 14.4%(2020년)에서 13.7%(2021년)로 줄었고, 금융업에 이어 둘째로 호봉제 비율이 높은 전기·가스업종도 같은 기간 43.4%에서 36.7%로 감소했지만, 금융권은 변하지 않고 있다.
◇14개 은행 중 13개 은행 ‘호봉제’
금융업종 중에서도 은행권은 ‘호봉제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금융산업위원회가 지난해 국내 19개 은행 중 국책은행(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카카오뱅크, 케이뱅크)을 뺀 14개 은행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연봉제를 채택한 곳은 SC제일은행 1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SC제일은행마저도 여전히 호봉제로 임금을 받는 직원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 철수 수순을 밟고 있는 미국 씨티은행도 한국식 호봉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씨티은행은 2004년 한미은행 인수 이후 17년이 지났지만, 임금 체계를 통일하지 못했다. 기존 씨티은행 직원들은 연봉제이지만, 한미은행 출신 직원들은 호봉제를 유지하고 있다. 씨티은행은 지난 2019년부터는 영업이익보다 인건비가 더 많은 상황에 처했다. 2019년 3068억원을 벌었는데 총 인건비가 3575억원이었다. 지난해에는 2509억원을 벌었는데 3930억원을 인건비로 썼다.
◇연공서열식 호봉제로 희망퇴직 반복
은행들은 자체적으로 신입 직원들부터 연봉제를 적용한 뒤 확대해가는 방식으로 임금 체계를 개편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공염불(空念佛)에 그치고 있다. 최근 들어 금융권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서 금융사들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력을 채용할 유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금융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금융권의 20대 직원 비율은 12.3%로 50대 이상 직원 비율(15.1%)보다도 낮다. 10년 전에는 20대(22.7%)가 50대 이상(7.6%)보다 월등히 많았고, 이 같은 ‘피라미드형’ 구조는 2016년까지 지속됐다. 2016년 이후 2019년까지는 20대와 50대가 비슷한 비율을 유지했는데, 지난해 신입 직원 채용이 줄면서 20대 비율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은행들은 인건비 부담을 덜기 위해 고액의 특별 퇴직금 등을 지급하면서까지 고임금 직원들을 희망퇴직 등의 방법으로 내보내는 중이다. 거의 매년 희망퇴직이 반복되는 이유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은 지난해 희망퇴직 등 해고 비용으로만 8310억원을 썼다. 올해의 경우 5대 은행 포함, SC제일·씨티은행 등 7개 은행 희망퇴직자(신청자 포함)는 5297명으로 집계됐다. 희망퇴직 조건은 갈수록 파격적이다. 월평균 임금의 36개월치를 특별 퇴직금으로 받을 수 있는데 최대 7억원 정도 목돈을 지급했다.
김우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영진의 리더십 부족, 내부 역량 파악 미흡, 노조에 대한 묵시적 배려로 아직까지도 성과 관리에 근거한 임금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며 “시대정신에 걸맞지 않는 호봉제 중심의 집단평가를 시급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