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IT 기업에 다니는 손모(39)씨는 최근 모든 금융권의 대출 한도와 금리를 조회해 볼 수 있는 앱을 설치했다. 지난 9월 서울에 12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구입하기로 계약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모자란 금액은 신용대출로 메우려고 했는데 은행에서 돈을 더 이상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금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결국 대출 비교 앱에서 검색해 모자란 금액 3000만원을 캐피탈사에서 연 이자 10%로 빌렸다.
손 씨는 “연말에 대출 조이기에 나섰던 은행들이 내년에 대출을 재개하면 낮은 금리로 갈아탈 계획이지만 캐피탈사에서 대출받았다는 이유로 대출을 내주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고신용자에게까지 문턱 높인 은행
지난 9월 이후 금융 당국의 가계 대출 조이기가 강화되면서 신용도가 높은 사람들마저 은행권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9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11월 KB국민은행의 신용대출 가운데 금리가 연 4% 미만인 고신용자 대상 대출 비율은 43.1%로 9월(70.1%)보다 크게 낮아졌다. 같은 기간 하나은행은 85.2%에서 22.3%로 급감했고, 신한은행(72.4%→53.5%)과 우리은행(87.4%→70.8%)도 마찬가지였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준금리가 올라 중신용자들이 밀려 나간 영향도 있겠지만 은행들이 신용점수 800점 이상인 고신용자 대출까지 대폭 축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신용자들은 그동안 ‘얼마나 빌릴 수 있을까’보다 ‘얼마나 싸게 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대출이 가능한지 여부부터 확인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조금이라도 낮은 금리를 찾아 이 은행, 저 은행을 찾아다니는 ‘금리 노마드(Nomad·유목민)’였던 고신용자들이 한 푼이라도 빌려주는 금융사를 찾아 떠도는 ‘대출 노마드’가 된 것이다.
대출 노마드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뉜다. ①대출 비교 앱을 이용하는 ‘손가락형’ ②개인 사업자 대출로 위장하는 ‘위장형’ ③제2금융권 지점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발품형’ 등이다.
◇손가락형·위장형·발품형 대출 노마드
대출이 어렵게 된 고신용자 중 상당수는 대출 비교 앱으로 몰리고 있다. ‘손가락’으로 신용점수와 소득 등 기본 정보를 입력하면 은행은 물론 캐피탈,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 대출 한도와 금리를 알려주는 앱을 이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대출 비교 앱인 핀다에 따르면, 9~11월에 새로 가입한 신용점수 800점 이상 고신용자는 직전 3개월보다 2.5배 늘었다. 같은 기간 신규 유입 고객은 1.7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6~8월 11~12% 수준이었던 고신용자 비율은 9월에는 19%로 급격히 늘었다.
신용대출 대신 개인사업자대출로 위장해 대출받는 경우도 있다. 회사원 정모(42)씨는 사려던 집이 몇 달 만에 15억원을 넘기면서 은행권 대출이 막혔다. 그는 “집을 담보로 시세의 90%까지 대출 가능하다”는 저축은행 관계자의 권유를 받고 개인사업자대출을 받았다. 개인사업자대출은 자영업자들이 사업 자금을 마련하고자 신용이나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이다. 정씨는 “회사원 신분으로 개인 사업자로 등록하면 문제가 될 것 같았다”며 “대출 중개인 권유를 받아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뒤 사업자 등록을 했다”고 말했다.
농·축협 등 상호금융권을 찾는 대출 노마드족도 늘고 있다. 상호금융사들이 고신용자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영업을 펼치면서 올해 2월부터 은행보다 대출 금리가 낮아졌다. 10월 기준 은행권 신용대출 평균 금리는 4.62%이지만, 상호금융권 금리는 4%다. 다만 상호금융권은 지점마다 대출 한도와 금리가 다르기 때문에 더 싼 금리 대출을 받으려면 일일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내년에는 각 금융사가 대출을 재개하지만 고신용자의 대출노마드 신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금융 당국이 내년 시중은행 가계대출 증가율 관리 목표치를 올해(최대 6%대)보다 낮은 4.5~5.5%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 정부·여당이 내년 중·저신용자 대출을 늘린다는 방침이어서 상대적으로 고신용자 대출 규제가 강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