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가격이 치솟고 이를 악용한 자금세탁·사기·시세조종 등 불법 가능성이 커지자 정부가 특별 단속에 착수했다. 19일 국무조정실은 “4~6월을 ‘범정부 차원의 특별단속기간’으로 정하고, 관계기관 합동으로 (가상화폐 관련) 불법행위 등을 집중 단속키로 했다”고 했다. 이번 특별 단속에는 금융위원회·기획재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법무부·공정거래위원회·경찰청 등 10개 부처가 참여한다.
현재 국내 11개 가상화폐거래소 가입자는 900만명(중복 포함) 정도다. 작년말 2000만원대였던 비트코인 가격은 최근 8000만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자동차와 수천만원 당첨금 등을 미끼로 투자자를 모집해 시세조작을 하거나 해킹을 당했다는 이유로 투자금을 챙겨 잠적하는 등의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가상화폐가 돈세탁에 이용되는 사례도 있다. 비트코인 국내 가격이 해외보다 1000만원 가량 비싼 ‘김치 프리미엄’ 현상을 이용해 국내에서 가상화폐를 인출해 중국 등으로 불법 송금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10월 가상화폐 포함 유사수신혐의업체 신고건수(555건)는 전년보다 42% 증가했다.
정부는 가상화폐거래소 폐업 등에 따른 피해 발생을 막기위해 최근 거래소별 현황을 공개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가상화폐거래소 등 사업자의 이용약관을 직권조사해 투자자에게 불리한 불공정약관을 찾아 시정 조치할 계획이다.
북한의 가상화폐거래소 해킹도 우려된다. 유엔(UN)은 2017~19년 북한이 한국 가상화폐거래소를 10차례 해킹해 864억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가상화폐, 하루 거래액 코스피 2배… 불법다단계·돈세탁 통로 되기도
부처 10개가 합동으로 단속에 뛰어들어야 할 정도로 가상 화폐 시장은 과열되고 있다. 불과 4개월여 만에 대표적 가상 화폐 비트코인 가격이 4배까지 급등했고, 국내 가상 화폐 투자 규모는 이미 지난달에 코스피 하루 거래 규모(15조원)를 넘어섰다. 현재 4대 가상 화폐 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의 일일 평균 거래량은 코스피 하루 거래 규모의 2배인 30조원에 달한다.
◇넉달 만에 122배 급등, 불법 다단계·사기까지
지난 16일 오전 8075만원까지 올랐던 비트코인 가격은 미국 재무부가 가상 화폐를 이용한 ‘돈세탁’ 조사에 나선다는 소문이 돌자 하루 만에 1000만원 가까이 폭락했다.
올 초 0원에 가까웠던 도지코인 가격은 미국 전기차 기업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창업자가 트위터에서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난 16일 2배로 뛰었다. 국내에서는 지난 17일 도지코인 거래액이 코스피 하루 거래액을 뛰어넘었다. 넉 달 전과 비교했을 때 도지코인 가격은 0.3센트에서 36.6센트로 122배 급등했다.
19일 금융위원회가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국내 4대 가상 화폐 거래소 거래 통계 자료에 따르면 1~3월 가상 화폐 거래액은 1486조2770억원으로 작년 총투자액(357조3448억원)의 4배를 넘었다.
가상 화폐와 관련된 불법 다단계, 투자 사기 등도 급증하고 있다. ○○투자그룹·△△투자연구소 등 이름을 내건 미등록 불법 유사 투자 자문 업체가 상가 사무실 등을 빌려 20여 명 규모 투자자 설명회를 여는 식이다. ‘가상 화폐 차트 분석 노하우와 코인 추천을 해주겠다’며 1년치 회비 250만원을 받은 뒤 환불을 요구하는 투자자에게 위약금 140만원을 요구하며 거절하다가 금융 당국에 적발된 경우도 있다. ‘지인을 소개하면 한 명당 12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불법 다단계 업체도 최근 경찰에 적발됐다. 이 업체 피해자만 500여 명에 1인당 최고 피해액은 4억원에 달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가상 화폐 관련 불법 검거 건수는 2018년 62건에서 작년 337건으로 444%(275건) 급증했다.
◇외국인 불법 차익 거래 정황에도 대응 못 해
국내에서 거래되는 비트코인 가격이 외국보다 높은 ‘김치 프리미엄’을 이용한 차익(差益) 거래도 급증하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싼 해외 거래소에서 가상 화폐를 사서 한국에서 팔아 차익을 남긴 후 이를 본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차익 거래 자체는 불법이 아니나, 가상 화폐의 경우 자금의 출처와 이동을 추적할 수 없어 자금 세탁에 악용될 수 있다.
KB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 등 5대 은행에서는 이달 들어 9일까지 개인 해외 송금액 중 중국으로 보낸 돈이 1억1030만달러로 지난달 중국 송금액(1억720만달러)을 넘어섰다. 한 은행원은 “이달 들어 중국에 송금하려는 중국인·조선족들로 갑자기 창구가 붐비고 있다”며 “‘김치 프리미엄'을 이용한 차익 거래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이 월 1만달러까지 송금 한도를 신설하고 5대 은행이 가상 화폐 관련 해외 송금은 아예 거절하기로 했지만 의심 거래를 모두 잡아내기엔 버겁다. 현행 외국환거래법상 건당 5000달러, 연간 5만달러까지는 송금 사유 등에 대한 증빙 서류 없이도 해외 송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왕좌왕' 대책 못 낸 정부
가상 화폐 투자가 급증하면서 투자 위험이 커지고, 가상 화폐와 관련된 유사 수신, 다단계, 사기 등이 늘어나는데도 정부의 대응이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18년 법무부가 “가상 화폐 거래소를 통한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고, 거래소 폐쇄까지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발표하자 ‘공황 매도’가 벌어지고, 2030세대들이 청와대 게시판에 불만을 쏟아내며 대소동이 벌어졌지만 이후 별다른 대책이 뒤따르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금융위가 가상 화폐 거래소 신고제와 실명 계좌 연동 제도를 발표했지만 여전히 허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관련 법까지 개정했지만 은행들에 구체적인 조건이나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뒤늦게 금융위는 범죄 연루 의심 거래를 검찰·국세청 등에 통보하고, 경찰은 가상 화폐 추적 프로그램 보급을 늘리며, 기재부는 금감원과 함께 외환거래법 위반 점검을 강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경제 부처가 아닌 국무조정실이 어정쩡하게 컨트롤타워를 맡은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제대로 된 주무 부처도 없이 오락가락 정책으로 시장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