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는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는 공격적 투자 성향을 보이다가도 나이가 들면 원금 보장을 중시하는 안정적 성향으로 바뀌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한번 정한 투자 성향을 평생 못 바꾼다는 게 말이 됩니까?”
금융 소비자 보호를 대폭 강화하는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시행(25일)을 1주일 앞두고 금융권 현장에서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고객의 투자 성향 파악과 상품 설명서 제공 등 여러 의무를 금융사들에 지웠는데, 이와 관련된 구체 기준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 기준 없는 소비자보호법
금융위원회는 17일 정례 회의를 열고 ‘금융 소비자 보호에 관한 감독 규정’을 의결했다. 작년 3월 공포한 금융소비자보호법의 하위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이 법에 따르면, 금융사들은 금융 상품을 팔 때 적합성 원칙, 적정성 원칙, 설명 의무, 불공정 영업 행위 금지, 부당 권유 금지, 광고 규제 등 6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적합성 원칙은 소비자의 재산 상황과 투자 성향에 부적합한 금융 상품 권유를 금지하는 것이고, 적정성 원칙은 고객이 투자하려는 금융 상품이 재산 상황이나 투자 경험에 비춰 적절하지 않을 때 고객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반하는 금융사는 관련 수입의 최고 50%까지 징벌적 과징금을 물어야 한다. 은행이 1조원 규모 금융 상품을 판매했다면 5000억원까지 과징금 폭탄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감독 규정까지 내놨지만, 여전히 모호한 조항이 남아 있다. 우선 보험사에서 변액보험이나 변액펀드를 가입할때 고객 투자 성향과 관련된 기준이다. 금소법에 따르면, 변액보험이나 변액펀드를 가입할 때 소비자의 투자 성향 등급이 한번 정해지면 변경이 불가능했다. 예컨대 원금 보장을 선호하는 안정형 투자자로 분류될 경우, 나중에 본인 투자 성향이 바뀌었다고 판단하더라도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는 고위험·고수익 상품엔 투자할 수 없는 것이다. 보험 업계가 “소비자 권익이 침해될 수 있다”고 지적하자 금융 당국은 각 사가 내부 기준을 마련해 소비자 투자 성향을 재진단할 수 있다는 지침을 줬다. 금융위 관계자는 “모든 금융상품의 투자 성향 등급이 불변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며 “금융사에서 시장 관행에 따라 기준을 마련하면 된다”고 밝혔다.
◇보험 설계사, 고객 대화 녹음해야
투자 상품 가입 시 금융사가 소비자에게 상품 설명서를 제공해야 하는데, 제공 방법에 대한 구체 기준도 없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10만원짜리 상품을 가입하든 1000만원짜리를 가입하든 상관없이 60장이 넘는 상품 설명서를 종이로 출력해 매번 고객들에게 전달하려고 한다”며 “환경 보호를 위해 사무실에서 종이를 사용하지 않는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금융 당국 관계자는 “6개월 계도 기간을 거치면서 업계와 협의해나갈 것”이라며 “계도 기간 중엔 상품 설명서를 허술하게 전달했다고 해서 금융사를 제재하진 않겠다”고 했다.
설명 의무 위반 시 고의·중과실 입증 책임도 종전엔 소비자들 몫이었지만, 금소법 시행 후엔 금융사가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금융사들은 판매 과정을 모두 녹음해야 한다. 창구에서 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은행은 녹취 장비가 마련돼있지만, 문제는 40만명에 달하는 보험 설계사다. 특히 설계사들은 영세한 보험 판매 전문 회사(GA) 소속이 많아 대다수가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이에 대해 금융 당국은 녹취 장비 구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줬기 때문에 유예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소비자들이 모바일과 인터넷 등 비대면으로 단순히 금융 상품 정보를 확인하고 싶을 때도 제약이 생긴다. 투자 상품 정보를 보려면 먼저 투자 성향 분석부터 해야 한다. 그 이후 얻을 수 있는 금융 상품 정보는 본인의 투자 성향에 적합한 상품으로 한정된다. 즉 안정형으로 분류된 소비자는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는 금융 상품 정보를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고객 처지에서 처음엔 불편할 수 있겠지만 장래에 발생할 수 있는 금융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취지”라며 “고객 편의를 높이는 방향에 대해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감독 규정에 허점이 많은 데다, 발표 시점이 법 시행 불과 1주일 전이라는 것도 문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법 시행 8일 전에 감독 규정을 발표하면 금융사들은 어떻게 준비하라는 것이냐”고 말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4월부터 금소법 시행준비 상황반을 운영해 업계 애로사항을 파악하고 지침을 마련하도록 할 것”이라며 “금융사가 자체기준을 마련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준비 기간이 필요한 일부 규정은 적용을 최대 6개월 유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