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대중목욕탕을 운영하는 A씨는 작년 초 한 은행을 찾았다. 목욕탕 리모델링을 할 돈을 빌리려던 A씨에게 은행 직원은 기술 금융 대출을 소개해줬다. 업체의 기술력을 평가하는 기술신용평가사(TCB)에서 일정 이상 등급을 받으면, 금리도 우대받고 한도도 늘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목욕탕에 무슨 기술이 있겠느냐”며 시큰둥했던 A씨에게 은행 직원은 “자동으로 물이 꺼지는 절수기가 있으니 가능할 것”이라고 권했다. 실제로 A씨는 TCB에서 기술 등급을 받은 뒤 금리 우대를 받고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기술 금융은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매출이 없어 자금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혁신 기업들을 지원하자는 취지로 지난 2014년 7월 도입됐다. 그런데 은행들의 경쟁 과열로 대출을 남발하면서 본래 취지가 퇴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0일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위원회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기술 금융 대출 잔액은 올해 3분기 말 기준 260조4639억원을 기록했다. 2015년 말 잔액(42조3741억원)과 비교하면 5년 새 6배 이상으로 불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중 일부가 혁신 기업과는 거리가 먼 곳에 지원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러스트=김성규

◇생선 가게, 피아노 학원까지 기술 기업?

통상 돈이 필요한 기업이 은행에 기술 금융 대출을 신청하면, 은행은 TCB 업체에 의뢰해 해당 기업의 기술력을 평가한다. TCB 업체는 T1(최고 등급)부터 T10(최저 등급)까지 10단계 기술 신용 등급(T등급)을 부여하는데, T1~T6 등급을 받아야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금융 당국은 기술 금융을 장려하기 위해 매년 두 차례씩 각 은행의 기술 금융 대출 실적을 평가해 공개한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금융위원회가 실적 줄 세우기를 하니까 은행들은 기술 금융 대출 늘리기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은행 직원 평가(KPI) 지표에도 기술 금융 대출 실적이 반영돼 있기 때문에 은행 간 경쟁뿐 아니라 같은 은행 내 직원 간 경쟁도 치열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3년 전 한 복어 요릿집이 특허 20여 건을 보유하고 있기에 기술 금융 대출을 받아보라고 권유했다”며 “그만큼 업종에 관계없이 묻고 따지지도 않고 기술 금융 실적을 늘리기 급급하다”고 말했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생선 가게가 냉장고와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선 식품 관리 시스템을 보유한 기술 업체로 둔갑하고, 심지어 영어 학원, 피아노 학원도 이런 방식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기술 금융이 건전하게 유지되려면 은행이 대출을 남발하려고 해도 TCB 업체들이 이를 제지하거나 걸러야 한다. 그러나 TCB 업체들은 은행에서 기술 등급 평가 1건당 50만~100만원씩 수수료를 받는 하도급 업체 역할을 하다 보니 제대로 견제를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술 금융 연체액 3년 만에 3배

기술 금융 대출이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대출 부실화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작년 말 기준 기술 금융 연체액은 7995억원으로 3년 만에 3배가 됐다.

TCB 업체들의 기술 평가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창원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B씨는 작년 3월 기술 신용 등급이 있으면 유리하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TCB 업체에 수수료 60만원을 지불하고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평가위원은 공장을 둘러보기는커녕 서울의 한 카페에서 B씨를 만나 한 시간여 동안 면담한 뒤 T4 등급을 부여해줬다.

B씨는 “TCB 업체가 상패를 만들어준다면서 30만원을 또 요구하고, 회사 간판에도 패를 만들어준다는 명목으로 추가 요금을 내라고 하더라”라며 “돈만 내고 말만 잘하면 높은 등급을 받는 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고 전했다.

결국 금융 당국도 시장 점검에 착수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예전에 없던 새로운 대출 시장을 만든 것이다 보니 과열된 측면이 있다”며 “기술 금융의 본래 취지에 맞게 운영되도록 손봐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