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기업 이사들의 모임인 세계여성이사협회의 이복실 회장은 지난 7월 대기업 관계자로부터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사외이사로 선임할 수 있는 여성 후보를 최대한 많이 추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후에도 이 회장은 다른 대기업에서 비슷한 전화를 세 통 더 받았다. 전화를 건 인사 담당자들은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기 위해 인재풀(후보군)을 만들고 있는데, 계열사들까지 고려하면 최소 수십명의 여성 후보군이 필요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후보 추천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픽=박상훈

국내 기업들이 최근 세계여성이사협회·여성변호사회 등 여성 커뮤니티와 대학 등에 분주히 접촉하며 ‘여성 사외이사 후보 물색’에 나서고 있다. 지난 1월 자본시장법 개정에 따라, 자산 총액이 2조원 이상인 상장법인은 이사회에 여성 이사(등기 임원)를 최소 한 명 포함하도록 의무화돼 여성 이사 선임이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주요 기업들이 올 초 정기 주주총회에서부터 발 빠르게 여성 이사 중용에 나서면서, 코스피 기업 이사회의 여성 이사 비율은 작년 말 2.7%에서 올해 6월 말 3.5%로 높아졌다. 이 기간 전체 이사 수는 5203명에서 4564명으로 12.3%(639명) 감소했지만, 여성 이사 수는 140명에서 159명으로 13.6%(19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간 ‘방탄 유리 천장’으로 불리던 국내 기업의 여성 고위직 진출 장벽에 빠르게 금이 갈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

기업에서 여성 임원이 늘어나는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여성 이사를 의무적으로 이사회에 둬야 하는 이번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2년간의 유예 기간이 끝나는 2022년 8월까지 모두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자산 2조원 이상인 기업 147곳(3월 말 기준) 가운데 여성 이사가 재직 중인 회사가 45곳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내년과 후년의 주총까지 최소 100명 이상 여성 이사를 새로 선임해야 한다

◇여성 사외이사 찾기 동분서주

기존 이사 후보군에 여성이 워낙 드물었던 터라 ‘구인난’이라는 말도 나온다. 내부에서 단기간에 여성 사내이사를 배출하기보다 여성 사외이사를 찾는 것이 더 빠르다는 판단하에 기업들은 우선 사외이사 찾기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기업 관계자는 “보통 사장·부사장급은 되어야 사내이사가 가능한데 여성 고위직이 많지 않다 보니 외부에서 여성 이사를 모시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여성 사외이사는 ‘귀한 몸’이 됐다. 올 초 정기 주주총회에서부터 일부 기업이 발 빠르게 여성 사외이사 선임에 나섰다. 법 적용을 받는 147사 중 18사가 이번 정기 주총에서 여성 이사를 새로 선임했다. 특히 삼성그룹의 삼성SDI, 삼성SDS,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전기, 삼성카드 등 7개 계열사가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며 발 빠르게 대응했다. 업종 특성 때문에 ‘여성들의 무덤’으로 불렸던 한진중공업·SK하이닉스 등도 여성 이사를 선임했다. 유리 천장 높기로 유명한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KB금융지주는 지난 3월 주총에서 권선주 전 기업은행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면서 이사 7명 중 2명이 여성이 됐다.

조명현 고려대 교수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지금 현재 직책이 높진 않아도 젊고 능력 있는 여성 이사를 발굴하는 것이 이사회 다양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부 대학 등에선 예비 여성 이사들이 실무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여성 사외이사 전문 교육 과정’ 등도 만들고 있다.

◇올해 여성 임원 비율도 빠르게 올라

이복실 세계여성이사협회 회장은 “이사회에 여성 한 명이 들어간다고 해서 단번에 의사 결정 시스템이 크게 변화하진 않겠지만, 능력 있는 여성 임원을 발탁하고 승진시키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속가능경영 전문 미디어인 임팩트온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 이사 비율뿐 아니라 여성 비등기 임원 비율도 올 들어 크게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코스피 상장사 전체 임원 수는 작년 말 1만7333명에서 올해 6월 1만2059명으로 30%나 줄었지만, 여성 임원은 596명에서 554명으로 7% 줄어드는 데 그쳤다. 여성 임원 비율은 이 기간 3.4%에서 4.6%로 높아졌다.

전문가들은 이사회 성비 문제가 관심을 받으면서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여성을 임원으로 승진시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본다. 삼성전자는 지난 4일 발표한 정기 임원 인사에서 8명의 여성을 상무로 승진시켰고, 지난달 26일 LG그룹 임원 인사에서도 여성 임원 승진 규모로 사상 최대인 11명이 신규 임원으로 승진했다.

유리 천장이 높은 금융권도 변화하고 있다. 지난 10월 국내 민간 은행 중 처음으로 여성 은행장이 탄생했다. 한국씨티은행은 유명순 은행장 직무대행을 임기 3년의 신임 은행장으로 선임했다. 농협금융지주도 6일 출범 이래 처음으로 농협은행과 농협생명에서 여성 임원 2명을 동시에 발탁하는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