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가 채무와 재정 적자를 법으로 관리하는 재정준칙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시행 시기는 5년 뒤인 2025년으로 미뤘다. 역대 어느 정부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빠르게 나랏빚을 늘리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빚 관리를 포기하고 그 책임을 다음 정권에 떠넘기겠다는 얘기다. 더욱이 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는 시기가 2022년임을 감안하면 정권이 끝날 때까지 빚을 늘릴 수 있는 면죄부를 스스로 부여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2025년부터 국가 채무 비율을 국내총생산(GDP)의 60%, 통합 재정 수지 적자 비율을 GDP의 3% 이내로 관리하는 ‘한국형 재정준칙’을 도입하겠다고 5일 밝혔다. 전쟁이나 글로벌 경제 위기, 대규모 재해 후 경제 위기 같은 상황에서는 준칙 적용을 면제하고, 경기 둔화 상황에서도 통합 재정 수지 적자를 4%까지 허용하는 등 예외 규정도 폭넓게 두기로 했다. 기재부는 이런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연말까지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정부가 재정준칙으로 제시한 ‘국가 채무 비율 60%’는 그동안 우리 정부가 관행적으로 국가 채무의 마지노선으로 삼아왔던 40%에서 대폭 후퇴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15년 “국가 채무 마지노선인 40%가 깨지면서 나라 곳간이 바닥났다”고 주장했었다.

이날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코로나 위기 대응으로 재정 수지와 채무가 악화된 바로 다음 해부터 재정준칙을 바로 시작하는 건 적절치 않아 5년 유예를 뒀다”고 했다. 이에 대해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아무 제약 없이 재정을 펑펑 쓴 뒤 2025년부터 재정준칙을 시행하겠다는 건 재정 건전성을 중시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생색 내기"라고 했다.


예외 많고 국회 동의 없어도 수정… 이런 재정준칙 없었다

기획재정부가 5일 발표한 ‘재정준칙 도입 방안’에 대해 재정 전문가들은 “기획재정부가 산고 끝에 사상 초유의 ‘맹탕’ 재정준칙을 내놨다”고 입을 모았다. 국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돈을 계속 써도 막을 수 없게 만들었는데 그게 준칙이냐”며 “이름만 재정준칙일 뿐, 돈을 펑펑 쓰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태는 기재부의 재정준칙 도입 계획에 여당 의원들이 거세게 반대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기재부는 당초 8월 중 재정준칙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여당 반대에 밀려 추석 연휴 이후로 발표 시기를 미뤘고, 내용도 초안보다 대폭 후퇴한 안을 내놓았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5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한국형 재정 준칙 도입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한국형 재정 준칙엔 2025년부터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GDP)의 60%,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GDP의 3% 이내로 관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해당 준칙을 현 정부에는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뉴시스

◇어디에도 없는 희한한 한국식 재정준칙

기재부는 재정준칙 도입 방안에서 국가채무와 재정적자의 비율을 제한했다. 예산을 짤 때 국가채무는 GDP(국내총생산)의 60%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재정적자(통합재정수지)는 GDP의 3% 이내로 막도록 했다. 선진국들이 보통 재정준칙을 만들 때 쓰는 방식이다. 그런데 기재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두 지표를 곱한 숫자가 '1′을 넘지 않으면 문제없다는 새로운 계산식을 만들었다. 국가채무가 60%를 넘더라도 재정적자가 3%를 넘지 않으면 준칙을 지킨 게 된다는 것이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세계적으로 이런 재정준칙을 본 적이 없다”며 “준칙은 최대한 명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된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60% 기준도 너무 높다고 지적했다. 김원식 건국대 교수(전 한국재정학회장)는 “정부의 재정 전망을 보면 2024년엔 국가채무 비율이 58.3%로 증가하는데 사실상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돈을 계속 쓰겠다는 얘기”라고 했다. 유럽연합(EU)도 국가채무 기준을 60%로 정하고 있지만 EU와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저출산, 고령화는 물론 통일 비용까지 고려해 더 깐깐한 기준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그동안 채무 비율 40%를 사수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저출산·고령화 추세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빠른 상황도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고무줄 재정준칙

기재부가 이날 발표한 재정준칙에는 정부가 그동안 써온 ‘관리재정수지’ 대신 ‘통합재정수지’가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했다. 관리재정수지는 정부의 실제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지표이고, 통합재정수지는 여기에 국민연금·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성 기금 수지를 합친 것이다. 국민연금이 현재 대규모 흑자를 내고 있기 때문에, 통합재정수지는 관리재정수지보다 수치가 1~2%포인트가량 좋게 나온다. 통합재정수지 적자가 3%라면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4~5% 정도로 나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뜬금없이 통합재정수지를 기준으로 삼은 것은 적자를 줄이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예전처럼 3% 적자 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자 한도를 4~5%로 늘린 눈속임”이라고 했다.

이런 허술한 기준조차도 국회 동의 없이 정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국가재정법엔 기본 원칙만 담고 구체적인 한도는 시행령에 규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5년마다 재정준칙 수치를 재검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안도 담았다. 이렇게 되면 청와대나 여당이 상황 논리를 내세워 언제든 국가채무 비율 상한을 80%, 100%로 올릴 수 있다.

두루뭉술한 예외 조항이 많아 빠져나갈 구멍이 많은 것도 문제다. 예컨대 ‘경기 둔화 판단 시’ 재정적자를 3%가 아니라 4%까지 낼 수 있도록 했는데,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경기 둔화를 판단할 지 기준이 없다. 옥동석 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경기 둔화는 수시로 찾아오는데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며 “독립적인 재정 위원회를 만들어 예외 상황 여부를 판단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이런 고무줄 재정준칙은 다음 정권인 2025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세부 기준을 두고 국회 논의에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역대 정부 중 가장 방만하게 재정을 운용해온 현 정부가 정작 자신은 적용 대상에서 뺀 것은 ‘먹튀’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