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대기업에서 26년간 일한 임모(52) 부장은 올해 들어 심각하게 퇴사를 고려 중이다. 회사를 더 다니면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 수 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진 것이다. 은퇴 후 자산관리 상담을 받으러 은행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자신을 위한 서비스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지어 제2의 인생 구상을 위한 사무공간까지 제공하는 곳도 있었다. 임 씨는 “내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한다”며 “지금은 은행에서 제공하고 있는 동영상 강의를 통해 은퇴 후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씨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은퇴를 거부하며 건강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을 ‘쏠드(Sold)족’이라 한다. 스마트(smart)와 올드(old)의 합성어다.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도해나가는 의욕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스마트한 시니어를 가리킨다. 이들은 50대 이후에 새출발을 준비하거나 은퇴 이후 노후 준비에 관심이 많다. 오랜 경제생활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한 이런 5060 쏠드족이 금융사들의 새로운 핵심 고객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금융사들은 쏠드족을 잡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근로자들의 실질 은퇴 연령(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둔 연령)은 49.4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년이 60세로 정해져 있지만, 실제론 그보다 10년 먼저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5060세대 전용 상품에 제2 인생 구상을 위한 전용 공간까지
시중은행들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쏠드족 공략에 나서고 있다. 지난 2018년 11월 시니어마케팅 전담조직을 만든 우리은행은 전용 금융 상품은 물론이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5060세대를 위한 공간도 제공하고 있다. 신촌과 명동에 마련한 시니어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이다. 사전 신청만 하면 이곳에 있는 강의실과 미팅룸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사무실처럼 쓰며 연구 활동도 할 수 있다. 우리은행은 이곳에서 금융 교육과 은퇴 설계 서비스도 제공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확산하기 시작한 올해 2월부터 일시적으로 창구를 폐쇄했지만, 그전까진 한 달 평균 200~250명이 이 센터를 찾았다.
정인호 우리은행 개인영업전략부 차장은 “현재 금융자산이 가장 많은 세대가 50대이고, 둘째가 40대”라며 “고령 사회에 이어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면 5060세대가 가진 금융자산이 가장 많기 때문에 금융사들도 점점 이들을 위한 서비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민은행도 은퇴 세대 특화 서비스를 펼치고 있다. 지난 7월 국민은행은 은퇴 자산 전문 컨설팅 제공을 위해 KB골든라이프 센터를 오픈했다. 이 센터엔 자산관리 경력 최소 10년 이상인 은퇴설계 전문가들을 배치해 5060 고객들을 맞고 있다. 은퇴 준비 현황을 진단한 후 설루션까지 제공하고 있으며, 서울 서초와 노원, 부산, 광주 등 4곳에 설치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석 달간 수백여 명의 고객들이 이곳을 찾았다. 국민은행은 시니어 고객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요약해 매월 카카오톡으로 2회씩 전달해주고 있다.
하나은행 역시 올해 7월 은퇴 세대들의 자산관리를 전담하는 ’100년 리빙트러스트 센터'를 출범시켰다. 이곳엔 변호사와 세무사, 전문 상담 인력 등 20명으로 구성된 팀원들이 은퇴 세대들을 대상으로 맞춤형 상담을 해주고 있다. 부동산, 주식 등 자산관리는 물론 상속 계획까지 짜준다.
새마을금고는 지난 14일 만 50세 이상 만 70세 미만이 가입할 수 있는 자유입출금 통장 ‘MG오늘도 청춘통장’을 출시했다. 노령연금을 수급하거나 황혼 육아를 담당하는 5060세대에 다양한 금융 혜택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다. 창구 전용 상품으로 국민연금과 군인연금을 이 계좌로 받으면 0.1%포인트 우대 이율을 주는 등 최대 2.1%까지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쏠드족 되려면 은퇴 후 월 평균 298만원 생활비 확보해야"
금융권에서 쏠드족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곳은 신한은행이다. 이들을 공략하기 위해 상품개발부서에서 쏠드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비대면 금융 거래에 대한 50대 이용률이 30대보다 높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은퇴 세대가 디지털이나 언택트 시대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존 편견을 뒤집은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60세 정년을 맞이하는 인구는 92만명에 달한다. 작년 84만9000명에서 8.4%나 늘어난 것이다. 내년에도 정년을 맞는 인구는 91만2000명, 후년엔 87만9000명이 되는 등 당분간 80만~90만명의 은퇴족들이 쏟아져나올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50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은퇴하는 인원까지 감안하면 제2의 인생에 돌입하는 인구 규모는 이보다 더 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 은퇴족들은 아직까지 충분한 대비 없이 정년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금융그룹의 ’100년 행복연구센터'의 ‘금퇴족으로 사는 법’ 보고서에 따르면, 은퇴 후에도 은퇴 전과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선 매월 298만원의 생활비를 확보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지출 규모를 유지하려면 국민연금(약 131만원)을 제외하고 매월 167만원의 현금 흐름이 안정적으로 확보돼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은퇴자들은 전체의 8%에 불과했다. 100년 행복연구센터가 50~63세 퇴직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은퇴 후 필요한 노후 자금은 6억800만원이었다.
조용준 하나금융 100년 행복연구센터장은 “은퇴 세대들은 일을 그만둔 뒤에도 꾸준히 현금 흐름을 만들어야 하는데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은퇴 세대들은 노후 자금이 부족하다”며 “은퇴 후에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금퇴족’이 되기 위해선 40대 초반 이전에 기반을 마련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