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산업화의 산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2026년 개원 60주년을 앞두고 대전환에 나선다. 설립 이래 철강·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밑그림을 그리며 ‘한강의 기적’을 뒷받침해온 저력을 바탕으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작년 3월 제26대 원장으로 취임한 오상록(67) 원장이 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KAIST)에서 로봇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38년간 KIST에 몸담으며 요직을 두루 거친 연구 행정 전문가다. 2000년대 초반 정보통신부 지능형 로봇 PM을 맡아 국가 로봇 산업의 청사진을 그리기도 했다.
오상록 원장의 현재 핵심 아젠다는 ‘글로벌 기술 실용화’다. KIST가 국내 유망 기업을 글로벌 시장에 안착시키는 ‘비즈니스 페이스메이커’로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과학자가 직접 뛰어드는 기술 현지화
오 원장이 주도하는 ‘협력기업 글로벌 진출 연구지원사업’은 해외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공동 개발해주는 사업이다. 기술 독자 개발이 힘든 기업들 입장에선 가뭄에 단비 같다. 창업기업, 패밀리기업, 홍릉강소특구 입주기업 등 1000여 개에 달하는 방대한 협력기업이 주요 대상이다. 이들 기업은 글로벌 진출과 관련해 ‘기술의 현지화’와 ‘신뢰도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낯선 한국 중소기업의 제품에 대해 까다로운 검증을 요구하거나, 현지 환경 규제 등에 맞게 스펙 변경을 요청하는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KIST는 ‘협력기업 글로벌 진출 연구지원사업’을 통한 공동 기술 개발과 지원으로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있다. 오 원장은 “우리 기업이 현지 규제에 막혀 기술적 난관에 봉착했을 때 KIST 연구원이 직접 투입돼 문제를 해결한다”며 “해외 파트너에게 ‘KIST가 기술을 보증한다’는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했다.
KIST는 미국 보스턴(K-BB), 독일(KIST 유럽연구소), 인도(한인도협력센터), 베트남(VKIST) 등 자체 운영 또는 협력 중인 4대 글로벌 거점을 전초기지로 삼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현지 연구소·지자체와 협력해 우리 기업이 필요로 하는 실증 R&D를 현장에서 직접 수행하고 있다. 눈에 띄는 성과는 유럽과 베트남에서 나타나고 있다. 환경 촉매 기술을 보유한 ‘지스코’가 대표적이다. 이 기업은 유럽의 엄격한 환경 규제를 충족하는 기술 데이터가 필요했는데, KIST의 기술 고도화 및 실증 테스트 지원을 통해 유럽 규제 장벽을 넘고 있다. 베트남에선 건강식품 기업의 효능 인증 지원, 인삼 등 가공 기술 지원 등 사례가 나왔다. 베트남 진출을 희망하는 한국 기업 4곳과 한국 기술을 원하는 베트남 기업 2곳 등 6개 연구 과제가 진행되고 있다.
◇은퇴 과학자의 30년 노하우, 스타트업의 무기로
전방위적 기술 지원은 KIST가 보유한 막강한 인적 자산 덕이다. 오 원장은 내년부터 ‘고경력 연구자’를 협력 기업과 연결하는 상생 모델 구축을 계획 중이다. “연구원 한 명이 30년 넘게 KIST에 근무하며 수행하는 프로젝트는 100개가 넘습니다. 이런 베테랑 연구원을 ‘기업 지원 전담 인력’으로 배치해 그 노하우를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게 할 계획입니다.” 베테랑 연구원들이 우리 기업들의 ‘기술 멘토’가 될 수 있다면 천군만마와 같은 힘이 될 수 있다. KIST는 이미 은퇴 연구자를 재채용해 기업 지원 업무를 맡기는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 중이다.
오 원장은 ‘가치의 선순환’ 비전을 그리고 있다. KIST 지원으로 기업이 성공했을 때 그 과실을 사회에 환원하는 ‘선한 의지’의 파트너십이다. 성공한 기업이 자발적으로 ‘KIST 미래재단’에 기부하고, 그 재원이 다시 도전적인 미래 연구에 투자되는 구조다. KIST 미래재단은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사업 등을 하는 곳이다. “정부 예산만으로 시도하기 힘든 자폐 치료 연구나 기후 변화 대응 같은 난제 프로젝트에 이 기부금을 활용할 수 있겠죠. 우리 기업과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통해 기술 사업화의 성과가 다시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