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확장현실(XR) 등이 대표적이다. 기술 발전 덕분에 유실된 문화유산을 AR을 통해 보거나 유명 아이돌과 사진을 찍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됐다.
AR 스타트업 애니펜 전재웅(49) 대표는 ‘다양한 경험’에 방점을 찍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100이라면, AR·XR 기술을 통해 200, 300이 넘는 세상을 보며 삶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한다. 전 대표를 만나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AR 기술 이야기를 들었다.
◇분야를 뛰어넘어 종횡무진하는 AR·XR 기술
애니펜은 2013년 출범한 AR 스타트업이다. 증강현실을 비롯해 XR, 인공지능(AI) 등을 결합한 새로운 메타버스 개발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디지털 트윈(물리적 사물을 컴퓨터에 동일하게 가상으로 표현한 모델), AR·XR 기술 등을 바탕으로 구글·아마존웹서비스·마이크로소프트·산리오·라인프렌즈·NC다이노스 등 다양한 분야의 국내외 기업과 협업하고 있다.
특히 670개가 넘는 캐릭터를 보유한 IP 파트너들과 협업하며 독창적인 콘텐츠를 제작했다. 애니메이션 IP 기반의 모바일 게임, AR 드라마를 제작하는가 하면, 문화재 메타버스 ‘헤리버스 공존’도 만들었다. 유실된 문화재를 디지털로 복원하고 현존하는 유적 공간을 디지털로 구현해 실감형 문화재 체험을 가능케 했다.
◇끄적임의 미학
유난히 손재주가 없었다. “미술 시간만 되면 위축됐어요. 그래도 상상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습니다. 다만 그 상상을 직접 그려낼 수 없었을 뿐이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컴퓨터를 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어요. 손으로는 못 만들어도 컴퓨터로는 가능했습니다. 머릿속에만 살던 드래곤을 화면에 점을 찍는 방식으로 만들고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까지 구현했어요.”
상상을 직접 현실로 만드는 일. 이 경험을 모든 사람이 해볼 수 있길 바랐다. 성인이 돼서도 이 꿈은 이어졌다. 1997년 연세대 컴퓨터과학과에 입학해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차례로 밟았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모두가 익힐 수 있고 까먹지 않는 기술이 바로 ‘끄적임’인데요. ‘끄적임만으로 3D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습니다. 박사 과정 중에 전공생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개론, 프로그래밍 등에 대한 강의도 했어요. 5~10년 내 컴퓨터 산업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내용을 늘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친 후에는 대학 강의와 소프트웨어 응용 연구소 생활을 병행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대기업도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어요. 연구소에 있어 보니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만 만들어야 하더군요.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고, 알리려면 단 하나의 선택지뿐이었어요. 그게 ‘창업’이었습니다.”
◇뽀로로와 더 가까이 노는 법
2013년 1월 ‘애니펜’을 설립했다. ‘펜(pen)에 생명을 부여한다(Animated)’는 뜻이다. 한글과컴퓨터의 지원을 받아 책상 2개에 의자 2개를 놓을 정도의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처음부터 주력한 분야는 AR(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디지털 정보를 덧붙이는 기술)이다. “경험을 증강시키는 기술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용자가 드로잉(drawing)을 하면 캐릭터가 움직이는 기술 등 10여 개의 특허 받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죠.”
구글에서도 AR은 역점 사업 분야였다. 당시 구글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주변을 비추면 방 모양을 3D로 인식해주는 이른바 ‘프로젝트 탱고’를 선보였다. “특허 기술을 등에 업고 구글 담당자에게 냅다 메일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증강 현실화해 콘텐츠로 만드는 스타트업이라고 소개하며 구글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죠. 그 메일을 계기로 구글의 엔지니어가 한국으로 찾아와 미팅했고, 애니펜이 정식 파트너사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주로 콘텐츠 제작 앱을 만들었어요. 커뮤니티·내비게이션 앱 등에서 카메라를 켜서 주변을 비추면 캐릭터가 뛰어다니는 식이죠.”
2018년 ‘뽀로로월드 AR 소꿉놀이’를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IP 기반 모바일 게임을 차례로 론칭했다. “AR 세상에서 뽀로로, 크롱, 루피 등 캐릭터와 함께 인형 뽑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게임을 할 수 있게 구현했죠. 구글 플레이에서 인기 앱 전체 1위, 애플스토어 가족 앱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영상 콘텐츠에서 벗어나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IP사의 만족도도 높았습니다. 로보카 폴리, 캐치! 티니핑, 미니특공대 등 애니메이션 IP 기반 모바일 게임을 모두 합하면 전체 다운로드 수가 1900만회에 육박합니다.”
AR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하다. “애니메이션 IP 기반 게임에 이어 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2025년에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뽀로로 AR 드라마는 조회수 7500만회를 기록했죠. 또 다른 유명 IP사인 산리오, 한국 프로야구팀인 NC 다이노스와 협업해 설치한 키오스크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AR 기술을 활용해 선수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한 것처럼 연출하거나, 사용자의 옷차림과 배경을 야구 유니폼, 야구장으로 바꿔주는 기술을 선보였죠.”
최근 가장 주력하는 분야는 AI다. “유명 IP사와 협업했다는 사실은 큰 성과이자 뼈아픈 지점이었어요. 자사 IP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애니펜만을 위한 IP’보다 ‘누구나 IP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 취지로 개발한 앱이 생성형 AI 앱인 ‘룸룸’입니다. 누구나 상상한 캐릭터를 손쉽게 만들고 이름·스토리를 더해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도록 했죠. ‘커뮤니티 서비스’의 정체성이 강합니다. 결과물을 피드에 공유하거나 댓글을 달 때도 AI 이미지를 만들 수 있어요.”
◇메타버스에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
애니펜은 2013년 설립 이래 꾸준히 규모를 키우고 있다. 현재 국내외에 50종의 특허를 등록한 상태다. 2023년 연 매출은 23억원을 기록했다. “기업·기관과 협업해 메타버스를 개발하며 발생하는 수익이 가장 비중이 큽니다. 2024년부터는 앞서 소개한 ‘룸룸’을 개발하는 데 시간·비용을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10월엔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의 도움을 받아 일본 도쿄에서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일본 시장 진출도 한 걸음 더 가까워졌죠.”
한때 미래를 주도할 것이라 여겨졌던 ‘메타버스’가 지금은 ‘한물 갔다’는 말을 듣고 있다. “테크 분야의 트렌드가 하나로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분야에 한참 투자했다가 가시적인 성과가 없으면 금세 다른 분야로 옮겨가죠. 메타버스가 사라질 것이란 얘기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안에서 사용자(유저)가 뭘 갖고 노느냐가 달라지는 겁니다. 이 생태계를 잘 키워나가려면 애니펜 외에도 다양한 기술을 가진 테크 스타트업이 독창적인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애니펜의 시작은 ‘끄적임’이었다. “처음부터 ‘끄적거림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목표였죠. 이제 70% 정도 온 것 같아요. AI를 도입하면서부터 결승점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사용자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최근 오픈AI가 AI 영상 생성 소셜미디어 앱을 출시했죠. 룸룸의 방향성이 옳다는 것을 확인한 셈입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생성형 AI로 소통하는 그날이 제 꿈을 이루는 날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