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협동조합이 대기업과 납품단가 등 거래 조건을 놓고 공식 협의를 요구할 수 있는 ‘협의요청권’ 도입이 추진된다. 이재명 대통령 국정과제로 추진되는 사안으로, 중소벤처기업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달 내 합의를 목표로 막판 조율을 진행 중이다.

지난 20일 대통령 주재 ‘중소기업인과의 대화’에서도 중기부와 공정위가 도입 계획을 재확인했다. 그간 중소기업계에선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도 개별 협상력이 약한 중소기업이 단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를 지적해왔는데 이를 바로잡는다는 취지다.

제도 도입은 공정거래법과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을 함께 개정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공정거래법을 고쳐 협동조합 소속 기업들이 납품단가 등 거래 조건을 사전에 공유·논의하는 행위를 담합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 협동조합법 개정을 통해선 대기업에 공식 협의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지금까지는 중소기업들이 모여 거래 조건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담합으로 판단될 수 있어 공동 협상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개별 협상력이 약한 중소기업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도 납품단가 인상을 요구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중기, 원가 급등에도 대응 못 해”

중소기업계에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에서 협의요청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컸다. 플라스틱 제조업이 대표적이다. 플라스틱공업 협동조합 관계자는 “납품 계약 이후 원료값이 급등해도 단가 조정 협상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라고 말했다. 플라스틱 산업은 대기업 석유화학사에서 원료를 공급 받고 식품·유통 대기업에 다시 납품하는 구조로, 가운데 낀 중소기업이 원가 상승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분야 제조업체 2만곳 중 99%가 10인 미만 사업장이라 협상력 자체가 취약하다.

주택가구업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주택가구협동조합 정오균 전무는 “계약 후 납품까지 6개월에서 1년 시차가 있는데, 그 사이 원자재 가격이 30% 이상 올라도 납품단가에 반영된 사례가 없다”고 했다.

◇대기업 “가격 상승 불가피…소비자 부담"

대기업 등 재계는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걱정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협동조합 단위 협의가 담합 예외로 인정되면 결국 가격 인상으로 이어져 소비자 부담이 늘 것”이라며 “수백~수천 개 협력업체와 거래하는 대기업은 비용과 경영 불확실성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부품 가격과 거래 조건은 기업 간 경쟁의 핵심인데 협상 과정에서 가격 전략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비용 부담이 커지면 해외 조달로 전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해외 일부 국가도 유사한 제도를 도입했지만 강도가 약하다. 호주는 연매출 1000만 호주달러(약 100억원) 이하 중소기업에 정부 승인 없는 단체협상을 허용했지만 교섭에 강제력은 없다. 일본은 중기협동조합의 단체협약 체결과 상대방의 협상 응낙 의무를 규정하면서도, 담합을 통한 부당한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예외로 두고 있다.

정부는 재계의 우려를 반영해 적용 범위를 제한할 방침이다. 소기업 조합은 폭넓게 허용하고, 중기업이 포함된 조합은 시장점유율·거래 의존도 등을 충족하는 경우만 협의요청권을 인정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실장은 “대기업-중소기업 간 교섭력 격차가 큰 구조에서 단체 협상 장치가 필요하다”며 “시장 경쟁을 훼손하지 않도록 제도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협의 요청권

중소기업협동조합이 대기업에 납품 단가 등 핵심 거래 조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협의 요구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 의원 발의안 등에 따르면 대기업이 정당한 사유 없이 협의에 응하지 않을 경우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게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