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태로 인한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하면서, 현지 시장을 공략해 온 1만4000곳의 중소기업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제품 생산을 모두 마쳤는데 거래가 취소되거나, 대금을 받지 못한 채 바이어와 연락이 두절되는 등 현지 비즈니스가 사실상 중단된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중동은 국내 중소기업의 핵심 수출 시장이다. 미국·유럽 등 선진 시장 대비 규제, 인증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아 신제품을 테스트하거나 초기 판로를 개척하는 시장으로 활용돼 왔다. 8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작년 중소기업의 대(對)중동 수출액은 64억5000만달러로 전체 중소기업 수출(1186억달러)의 5.4%를 차지했다. 중동 수출 중소기업도 1만3956곳에 달했다. 중소기업계에선 “대기업과 달리 기초 체력이 약한 중소기업은 사태가 장기화하면 유동성 위기로 자칫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통상부와 코트라는 지난 2월 11일(현지 시각) 이집트 카이로에서 ‘한-이집트 비즈니스 상담회’를 공동 개최했다. 이집트는 UAE,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우리 중소기업이 가장 많이 수출하는 중동국 중 한 곳이다. /코트라

◇수출 中企 1만4000곳 영향

미용 의료 기기를 중동에 수출하는 라윤코리아는 최근 이라크 바이어와 진행하던 거래가 갑자기 취소됐다. 10만달러(약 1억5000만원)어치 주문을 받아 제품 생산을 마치고 송금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최근 전쟁 여파로 거래가 중단돼 재고와 미수금을 동시에 떠안게 된 것이다. 이라크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주문이 취소됐고, 쿠웨이트 바이어는 연락이 두절됐다고 한다. 이 회사의 지난해 중동 매출은 92만달러로 전체 매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윤지혜 라윤코리아 대표는 “최근 중동 고객사들과의 거래가 속속 중단되고 있다”며 “당장 생산비와 직원 월급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UAE와 사우디아라비아에 필터 샤워기를 수출하는 중소기업 데일리차이도 비상이다. 사우디 바이어가 제품 테스트와 공장 실사까지 진행해 대규모 발주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최근 현지 바이어와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김경환 데일리차이 대표는 “남미나 서유럽 같은 대체 시장을 검토하고 있지만, 중동 리스크 여파가 해당 지역에도 미치고 있어 상황이 쉽지 않다”고 했다.

UAE,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내 중소기업 중동 수출의 53.5%를 차지하는 핵심 시장이다. 특히 UAE 두바이는 중동·아프리카 지역으로 뻗어 나가는 물류의 관문이다. 이 때문에 현지 바이어와 거래가 막히면 수출이 한꺼번에 중단되는 구조다.

◇‘수출 효자’ 중고차도 피해

중동 사태는 지난해 중소기업 수출 품목 1위였던 중고차 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중고차 수출 약 88만대 가운데 35%가 중동 국가로 향했다. 하지만 최근 호르무즈 해협 긴장으로 선박 운항이 차질을 빚으면서 선적 지연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한 중고차 수출업체 관계자는 “이미 판매된 차량들이 선적을 기다리며 야적장에 쌓이고 있다”며 “해상 운임 상승에 전쟁 위험 할증료까지 붙으면서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길 막힌 중고차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여파로 전체 중고차 수출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동 지역으로의 중고차 수출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 8일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옛 송도유원지의 중고차 수출 단지에 차량들이 빼곡히 주차돼 있다. /연합뉴스

이란 사태가 시작된 지난달 28일 이후, 중기부에는 60여 건의 피해 사례가 접수됐다. 유형별로는 운송 차질(71.0%·중복 응답)이 가장 많았고 대금 미수(38.7%), 물류비 증가(29.0%), 출장 차질(16.1%), 계약 보류(12.9%) 등이 뒤를 이었다.

정부는 중동 수출 기업의 물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긴급 물류바우처’를 신설하고, 패스트트랙 절차로 각종 비용 지원을 신속히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또 정책 자금 특별 만기 연장 등 자금 지원도 강화할 예정이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은 거래 규모가 작고 자금 여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미수금이나 해상 운임 폭등 등 물류 차질이 발생하면 곧바로 경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며 “신속한 금융 지원과 함께 대체 시장 발굴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