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이 한국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 등 세계 정상급 아이돌 그룹들이 신곡 발표와 동시에 한국의 역사적 공간을 무대로 선택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결합한 콘텐츠 기획이 산업 전반의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K팝 ‘문화 플랫폼’으로 진화
BTS는 오는 20일 새 앨범 ‘아리랑’을 발표하고 3년 9개월 만에 완전체 활동에 나선다. 수백 년간 민족 정서를 담아온 전통 민요의 제목을 앨범명으로 채택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첫 무대는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다. 공연은 경복궁 내부에서 시작해 광화문과 월대를 지나 광장 북측 특설무대로 이어질 예정이다. 조선 왕조의 법궁과 현대 도심 광장을 연결하는 동선 자체가 서사의 일부로 기획됐다.
BTS 소속사 하이브는 “아리랑이 지닌 상징성을 고려해 한국을 대표하는 공간에서 첫 무대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하이브는 전통적 상징과 첨단 공연 기술을 결합한 연출을 선보일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은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단독 생중계된다.
BTS의 복귀는 회사 실적 개선과 직결된다. 증권가에서는 하이브의 올해 매출이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증가한 4조2000억원, 영업이익은 10배 늘어난 5300억원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해 하이브는 매출 2조6499억원, 영업이익 499억원을 기록했다.
YG엔터테인먼트(와이지엔터테인먼트)의 블랙핑크 역시 유사한 전략을 택했다. 블랙핑크는 지난 27일 미니 3집 ‘데드라인’을 발매하고 3년 5개월 만에 완전체 활동을 시작했다. 최근 블랙핑크는 전 세계 아티스트 최초로 유튜브 구독자 1억명을 돌파했다.
블랙핑크는 신보 발매와 동시에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박물관 메인 로비 ‘역사의 길’에서 전곡 리스닝 세션을 열고, 외관을 핑크 조명으로 연출했다. 멤버들은 금동반가사유상, 백자 달항아리 등 대표 유물 8종의 오디오 도슨트 녹음에도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K팝 IP(지식재산권)와 국가 문화유산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음악 소비를 전시·체험 공간으로 확장하면서 팬 경험을 다층화하는 전략이다.
엔터업계는 이러한 흐름을 K팝 산업의 위상 변화와 연결해 분석한다. 과거 K팝은 해외 음악 시장의 형식을 차용하고, 군무·퍼포먼스 중심의 차별화 전략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최근에는 전통 요소와 한국적 공간을 콘텐츠 기획 단계에서부터 결합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고도화하고 있다. 글로벌 OTT와 음원 플랫폼을 통한 동시 공개가 일상화되면서, 상징성이 분명한 장소와 문화유산은 단순 배경을 넘어 서사의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전통 문화유산이 지닌 고유한 아우라가 K팝 콘텐츠에 상징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며 “K팝이 이제는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을 매개하는 문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시도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전통문화와의 지속적인 소통과 결합을 통해 한국이 소프트파워 강국으로 성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제 한국의 K팝과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 ‘골든’은 글로벌 차트에서 성과를 거두며 한국적 세계관과 K팝의 결합 가능성을 보여줬다.
◇정책 환경도 변화…K팝과 문화유산 결합 본격화
K팝과 문화유산의 결합 흐름은 정부의 소프트파워 전략과도 맞물린다.
이재명 정부는 ‘글로벌 소프트파워 5대 강국’ 비전을 제시하며 문화산업의 전략적 육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JYP Ent.) 대표 프로듀서를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정부는 이를 통해 민관 협업 체계를 구축하고, K팝과 전통문화의 결합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김남조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경복궁은 이미 해외 관광객이 꾸준히 찾는 대표 문화유산이지만, BTS 공연을 계기로 글로벌 팬들에게는 ‘성지’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번 공연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로, 공연 이후 정부가 서울, 나아가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어떻게 확장·재생산할지에 대한 전략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한 “대규모 공연을 질서 있고 완성도 높게 운영하는 과정 자체가 한국 사회의 성숙한 문화 역량과 공공질서를 보여주는 첫 번째 과제”라며 “콘텐츠의 성공뿐 아니라 현장 운영과 도시 관리 수준까지 국가 브랜드와 직결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