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종이컵 산업이 정부의 일회용품 규제 혼선 속에서 구조적 위기에 놓였다. 규제 강화와 완화를 반복하는 사이 종이컵 산업의 핵심인 원지(原紙) 생산 기반이 약화됐고, 이를 가공해 완제품을 만드는 중소업체들도 잇따라 문을 닫고 있다.

◇수입산 원지 90%…흔들리는 산업 근간

종이컵 산업은 원지를 생산하는 제지업체와 이를 공급받아 컵을 제조하는 중소 가공업체로 구성된다. 과거에는 국내 제지기업이 원지를 생산하고, 중소업체가 완제품을 만드는 분업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국내 기업이 시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정부의 오락가락한 정책이 시장 구조를 뒤흔들었다.

24일 제지·종이컵 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종이컵 생산용 원지 시장의 약 90%를 중국산 등 수입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2019년만 해도 수입산 비중은 50% 안팎이었지만 6년 만에 크게 늘었다. 종이컵 산업의 출발점인 원지 단계부터 해외 의존도가 심화된 것이다.

서울 시내 한 식당 내 테이블에 종이컵이 쌓아 올려져 있다. /뉴스1

기후에너지환경부는 2019년 식당 등 매장 내 일회용 종이컵 사용을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종이컵은 내부에 액체가 새지 않도록 얇은 플라스틱 코팅이 적용되는데, 이 코팅층 때문에 재활용이 쉽지 않아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2021년 관련 법령을 개정하고 2022년 12월 시행을 예고했다. 그러나 소상공인 부담과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1년간 계도기간을 부여했고, 2023년 12월에는 규제를 전면 철회했다.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동안 기업들은 설비 투자 결정을 미루거나 사업을 정리했다. 정부 규제 이전에는 깨끗한나라, 한솔제지, 무림페이퍼 등이 종이컵 원지를 생산하며 시장을 주도했다.

특히 깨끗한나라는 1970년대 종이컵 원지 국산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규제 강화로 시장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원가 부담이 커지자 깨끗한나라는 2019년 종이컵 사업에서 철수했다.

현재 한솔제지와 무림페이퍼가 원지 생산을 이어가고 있지만 생산 규모는 과거보다 줄었다. 원지 생산 기반이 약화되면서 국내 중소 가공업체들도 수입 원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뀌었다.

가공업체의 경영 환경도 악화됐다. 한국종이용기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중소 종이컵 가공업체 수는 2019년 약 150개에서 지난해 말 약 85개로 감소했다. 6년 만에 40% 이상 줄어든 셈이다. 업계는 현재 국내 종이컵 완제품 시장의 10~20%를 중국산 제품이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 저가 제품의 시장 침투가 심화되면서 중소업체들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 종이컵 생산업체 CEO는 “정부 정책이 단기간에 여러 차례 바뀌면서 설비 투자나 생산라인 증설을 결정하기 어려웠다”며 “규제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 보니 투자를 보류하는 것은 물론, 시장의 지속 가능성을 낮게 보고 사업을 정리한 업체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저가 수입 공세…품질·안전성 논란

종이컵의 품질과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과거 국내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던 시기에는 제품 강도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됐다.

그러나 최근 유통되는 일부 저가 수입 제품은 강도가 약해 두세 개를 겹쳐 사용해야 하는 사례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내부 코팅층에서 미세플라스틱이나 화학물질이 용출될 가능성도 우려한다.

전문가들은 일회용품 감축이라는 정책 목표와 산업 경쟁력 유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종이컵 등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겠다는 정책 방향 자체는 타당하다”면서도 “다만 정책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시장에 혼선을 주고 기업의 투자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홍 소장은 이어 “정부가 중장기적으로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며 “식품과 접촉하는 종이 제품에 대해서는 유해물질 기준을 보다 엄격히 설정하고, 고품질 제품에 투자한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