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인천 서구 삼창주철공업에서 이규홍 회장이 소방용 밸브 제품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이 회사는 ‘2025년 명문 장수 기업’ 10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고운호 기자

인천 서구에 있는 삼창주철공업. 뻘건 쇳물을 붓는 주조 공정을 지나자 어른 얼굴만 한 크기의 원형 밸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화재 발생 시 건물의 물탱크에서 스프링클러로 향하는 물길을 터주는 소방용 버터플라이 밸브(Butterfly Valve)다. 이 회사가 만드는 버터플라이 밸브들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 안전 규격을 뚫고 미국과 유럽 등 해외로 수출된다. 삼창주철공업의 주력인 버터플라이 밸브는 원판(디스크)이 나비 날개처럼 회전하며 배관을 여닫는 장치다. 기존의 게이트 밸브가 나사를 여러 번 돌려야 열리는 것과 달리, 90도만 돌리면 즉시 개방돼 촌각을 다투는 화재 현장에 최적화된 기술이다.

삼창주철공업은 중소벤처기업부와 중소기업중앙회가 선정한 ‘2025년 명문장수기업’(총 10곳)으로 선정됐다. 1967년 작은 주물업체로 시작한 이래 58년간 글로벌 소방 밸브 시장의 ‘히든 챔피언’으로 변신한 혁신성을 인정받은 결과다.

삼창주철공업의 시작은 1967년 이희준 창업주(별세)가 서울 구로에 세운 삼창주작소였다. 당시엔 난방용 배관 이음쇠나 자동차 부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주물 공장이었다. 회사의 운명이 바뀐 건 1981년, 2대 이규홍(79)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이 회장은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우리 브랜드가 찍힌 최종 완제품을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가 주목한 것이 소방용 밸브였다. 국내 소방 산업은 불모지였지만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필수 안전 자재로 수요가 컸기 때문이다.

◇0.1초 만에 물길 연다… 아시아 최초로 미국의 ‘기술 장벽’ 넘다

3일 오후 인천 서구 삼창주철공업에서 이규홍 회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고운호 기자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UL(Underwriters Laboratories)과 FM(Factory Mutual) 인증이라는 큰 장벽을 넘어야 했다. 고압의 물살을 10년 이상 버텨도 누수가 없어야 한다는 극한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이 회장은 “미국 규격은 밸브를 조작하는 기어박스를 알루미늄이 아닌 강한 주물 소재로 만들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정밀 가공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고 말했다. 주물 부품 생산부터 조립까지 전 공정을 갖추고 있다는 강점을 바탕으로 5년에 걸친 실험과 시험 끝에 이를 돌파했다. 결국 1987년, 일본 기업들도 해내지 못한 ‘아시아 최초’ UL·FM 인증을 획득했다.

환호도 잠시. 밸브 2500개를 첫 수출했지만 한 상자에서 불량 1개가 나오면서 20만달러어치 물량 전체를 폐기하는 아픔을 겪었다. 경영상 위기를 감수하는 결단은 전화위복이 됐다. ‘삼창은 믿을 수 있다’는 신뢰를 쌓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회장은 “그때 포기했다면 지금의 삼창주철공업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창주철공업은 현재 미국 내 빌딩과 공장 등에 사용되는 소방용 버터플라이 밸브 시장의 30~40%를 점유하고 있다. 캐나다와 튀르키예, 러시아, 호주 등 전 세계 소방 메이저 업체에도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 202억원 중 70%가 수출이고, 그중 70%를 미국이 차지한다.

◇리콜 위기 딛고 신뢰 확보… “글로벌 장수 기업으로”

명문장수기업 로고 /중소기업중앙회

2010년대 후반 중국의 저가 공세로 위기를 맞았을 땐 스마트 설비 도입을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버텼다. 올해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관세 전쟁은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중국에 대한 현지 수입 규제가 강화되고, 삼성·현대차 등 국내 기업들이 잇따라 미국 현지 공장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미국의 엄격한 인증을 통과한 우리 제품을 찾는 수요가 더 늘고 있어 올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공장 증설을 통해 생산 능력을 30% 이상 확대하는 내년엔 중국에 잠식당했던 유럽과 중동 시장 본격 탈환을 노린다.

가업을 이을 후계자가 없어 고민하는 많은 중소기업과 달리, 삼창주철공업은 100년 기업을 향한 발걸음이 가볍다. 삼성엔지니어링 출신인 창업 3세 이영표(43) 대표가 아버지 곁에서 해외 영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 회장은 “미국 시장을 제패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전 세계 소방 안전을 책임지는 글로벌 장수 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