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티슈·유아용 화장품 등을 만드는 한울생약 한종우(47) 대표는 지난 4월 2일을 잊지 못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전 세계 상대 상호 관세를 발표하며 ‘해방의 날(Liberation Day)’로 선언한 날이다. 매출 1200억원 중 800억원을 미국에서 올리던 이 회사는 그 직후 미국 고객사로부터 500억원 규모 계약을 보류하자는 통보를 받았다. 한 대표는 “반년이 지난 지금 계약이 재개되기로 했지만 당시 원부자재를 대량으로 주문하고 공장 설비까지 늘린 상황에서 계약이 중단되니 눈앞이 캄캄했다”고 했다. 그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한다”고 했다.
중소기업중앙회(중기중앙회)가 23일 제주 롯데호텔에서 개막한 ’2025 중소기업 리더스포럼’의 최대 화두는 미국발 관세 폭탄과 비자 장벽 문제였다. 전국에서 모인 중소기업 대표 400여 명의 분위기도 한종우 대표와 다르지 않았다. 올해 18회째를 맞은 중소기업계 최대 연례행사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관세 정책과 미국 조지아주 한국 배터리 공장 근로자 대규모 구금 사태에 대한 우려로 가득했다.
◇고관세 부담에 비자 불확실까지 이중고
중소기업 대표들은 저마다 어려움을 털어놨다. 정한성 한국파스너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미국 수출이 매출의 20%를 차지하는데 지난 6월 철강 품목에 50% 관세가 부과된 뒤로는 신규 수주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은 “정부가 철강은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신용문 한국금형산업협동조합 이사장도 “오는 10월 대미 계약을 앞두고 있는데 자동차 부품 관세가 15%로 내려가지 않고 있어 걱정”이라며 “관세 부담 때문에 단가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고객사가 계약을 끊을 수 있어 진퇴양난”이라고 했다. 최근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대규모 구금 사태도 불안을 키우고 있다. 이재광 한국전기에너지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미국은 인건비가 너무 비싸 국내 인력 동반 진출이 불가피한데 비자 문제로 인해 당장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미국발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에도 중소기업들은 미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절박한 처지다. 국내 소비 인구가 매년 40만명씩 급감하고 있어 내수로는 성장에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주요 대기업들이 해외로 생산 기지를 옮기면서 협력업체들도 동반 진출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 제조업체의 48%가 1, 2, 3차로 이어지는 수직적 분업 구조에 속해 있어서 대기업을 따라가지 않으면 국내에서 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관세 위기, 기회로 삼자” 목소리도
이번 사태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경북의 한 자동차 부품사 대표는 “우리는 아직 25% 관세를 맞지만 중국·인도 업체들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라며 “중국·인도의 시장점유율을 빼앗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진짜 리스크는 국내”라며 “주 52시간제에 이어 주 4.5일제까지 추진되면 인건비 부담은 더 커져 중소기업이 버티기 힘들다”고 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11일부터 20일까지 미국 수출 중소기업 609사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서도 응답 기업 63.1%가 미국의 상호 관세가 대미 수출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답했다. 가장 큰 애로는 ‘미국 바이어의 가격 인하 요구’(47.8%)와 ‘수출 계약 감소·지연·취소’(40.7%)였다. 기업들은 정부에 ‘물류 지원’(73.2%), ‘정책 자금 확대’(38.8%) 등을 요청했다.
중기중앙회는 기업들의 절박한 요구를 반영해 포럼 이틀째인 24일 ‘미국 진출 전략 세미나’를 별도로 마련한다. 현지 금융·보험·법률 전문가들이 참석해 중소기업인들에게 실질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