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업체는 일거리 생기면 오늘은 옆집 아저씨가 일하고, 내일은 다른 집 아저씨가 현장에 나와요. 이런 상황에서 안전관리를 위해 직원들 출입증 만들어 근태 확인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강원도 인제에서 직원 5명을 두고 소규모 건설 공사를 한다는 최모(65)씨는 14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수원메쎄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재차 촉구 결의대회’에 참석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중소기업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이같이 말했다.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까지 확대된 중대재해법 시행 유예를 촉구하기 위해 또다시 수천 명의 중소기업인과 소상공인이 모였다. 지난달 31일 국회 앞에서 36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했지만, 국회에서 유예 법안이 처리되지 않자 보름 만에 다시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다. 참석자들은 “사업주 처벌만 강조하는 중대재해법이 중소기업 현장에선 근로자 안전권 확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유예 법안을 오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반드시 통과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이날 행사장엔 중소 건설 업계와 중소기업단체협의회 등 14개 단체 소속 사업주와 임직원 등 400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달 국회 앞 집회 때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였다. 오후 1시 30분 결의대회 시작 전 준비한 좌석 2500석이 꽉 찼고, 자리를 잡지 못한 참석자들은 행사장 안팎에서 “촉박한 공사 시간, 사고 나면 형사 처벌” “중대재해법 불안감에 외국 인력도 못 쓰겠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행사에는 중대재해법 확대 시행으로 타격이 가장 심한 영세 건설업체 대표들이 가장 많이 참석했다. 강원도 홍천에서 전문건설업체를 운영하는 허모(64)씨는 “1000만원짜리 공사 하다가 사망 사고라도 나면 벌금으로 10억원을 물게 생겼다”며 “우리 같은 작은 건설사 줄줄이 망하면 근로자 안전은커녕 생계는 어떻게 지키느냐”고 했다. 정보통신 공사업체 엔서브를 운영하는 남궁훈 대표는 “하루라도 기업을 운영해 본 사람이면 이런 법을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들은 “중대재해법은 사업주와 근로자를 갈라치기 하는 악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선옥 삼주전력 대표는 “나 역시 현장에서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근로자인데 직장 동료들을 위험에 방치하겠느냐”며 “왜 중소기업 대표만 죽으라는 법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게임기 생산공장을 운영한다는 고병헌 대표는 “중소기업계가 중대재해 등 사고 위험에 대비하지 않겠다는 요구가 아니다. 안전관리를 더욱 잘 준비할 수 있게 시간을 좀 더 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행사엔 실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참석해 “중대재해법이 실제 사고를 줄이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도경 탑엔지니어링 안전보건팀장은 “현장을 직접 돌아보며 점검·관리를 해야 할 안전관리 담당자들이 중대재해법 관련 보고용 서류를 만드느라 현장을 챙길 여력이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 중소 건설사 안전관리 담당자는 “직원들이 건설 현장에 나오는 고령의 근로자를 일일이 붙잡고 스마트폰에 안전 관련 앱을 설치해 주는데, 핸드폰이 구형이면 해결책이 없다”며 “중대재해법 확대 시행은 현장 안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탁상행정”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계는 오는 19일 광주광역시를 시작으로 중대재해법 2년 유예법안이 처리될 때까지 전국을 돌며 집회를 이어가는 것을 검토 중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지역마다 중대재해법이 최대 관심사인 데다가 현장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열기가 뜨거워 자발적으로 결의대회를 열겠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