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북구의 도금 기술 기업 켐프(KEMP)는 작년 개발해 특허를 획득한 친환경 도금 신기술을 바탕으로 올해 사업을 크게 키워보려 했다. 5년간 고된 연구개발(R&D) 끝에 기존 아연도금보다 가격은 30% 싸면서, 수명은 3배쯤이고 폐수 발생은 줄인 친환경 기술이었다. 도금(鍍金)은 장식이나 부식 방지 등을 위해 물질 표면에 금속을 얇게 입히는 것으로, 우리 산업의 ‘뿌리’에 해당하는 핵심 기술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닥치면서 1월 중국 최대 볼트 제조사와 계약한 17억원어치의 대규모 주문은 기약 없이 연기됐고,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던 해외 거래는 완전히 끊겼다. 임직원 15명 가운데 80%가 연구개발하는 단단한 벤처 기업이었지만 코로나는 혹독했다.

9일 울산 북구의 도금 전문 업체 켐프에서 전창일 대표가 AI 처방으로 도금한 볼트(왼쪽)와 그러지 않은 볼트를 비교해 보여주고 있다. 도금이 잘돼 광택과 성능이 좋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김동환 기자
켐프 직원이 도금 설비를 조작하는 모습. /김동환 기자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그러나 회사는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멈춘 공장을 ‘AI(인공지능) 스마트공장 전환’의 적기로 본 것이다. 전창일(62) 켐프 대표의 아들인 전현준(35) 이사는 “도금은 젊은이들이 취업을 꺼리는 3D산업인 데다, 아버지나 60~70대 도금 장인의 노하우를 완벽히 이어받지 못하면 회사가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며 “코로나가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회사에 있는 누구도 AI나 스마트공장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수소문 끝에 울산의 한 기업인으로부터 중소벤처기업부가 운영하는 ‘AI 제조 플랫폼’ 지원 사업인 캠프(KAMP)를 소개받았다. 지난 8월 AI·공정 전문가 2명이 공장 곳곳을 꼼꼼히 뜯어봤다.

여느 도금 공장처럼 모든 관리는 수기(手記)로 이뤄졌고, 도금 공정도 장인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암묵지(暗默知)로 돌아가고 있었다. 암묵지는 학습과 경험을 통하여 개인에게 체화(體化)되어 있지만 말이나 글 등의 형식을 갖추어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을 뜻한다. “200암페어(A) 정도로 30분쯤 돌려보지, 안 되면 좀 더 해보고” 식으로 장인의 감(感)에 의존해 왔다. 매번 두세 차례씩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회사는 “심지어 공장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도 용량이 커져 컴퓨터가 느려진다는 이유로 주기적으로 삭제해왔다”고 했다.

◇AI가 바꾼 ‘암묵지’ 공정

도금 공정에 AI를 도입하는 12주간의 ‘변신’이 시작됐다. 정부에서 스마트공장 구축 전문기업인 ABH를 파트너로 매칭해줬다. 한아람 ABH 대표는 “작업자의 머릿속 노하우를 데이터로 정량화하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며 “공장 설비에 무게 감지, 두께 측정, 도금 품질 검사를 위한 초음파 센서를 설치해 데이터부터 쌓기 시작했다”고 했다. 과거엔 버려졌던 데이터가 하루 470메가바이트(MB)씩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켐프의 박종경 생산팀장은 울산·대전·인천 등 전국 각지의 도금 장인 40여명을 만나 머릿속 암묵지를 데이터화하기 시작했다. 담배 한 보루 안기고, 음식도 대접해가며 ‘○○○ 제품을 도금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어떤 변수를 고려하십니까’와 같은 설문을 받았다. 장인들의 노하우를 데이터화하고, AI가 분석해 10일 만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프로그램에 도금 의뢰품의 회사명 제품명과 함께 ‘무게 50㎏’ ‘두께 4.5㎜’ ‘미크론(도금두께) 6㎛’라고 입력하면 1초도 안 돼 ‘전류값 636A’ ‘작업시간 30분’이란 결과가 화면에 떴다. 전 이사는 “과거에는 32%였던 초기 불량률이 AI 도입 이후 4.9%로 떨어졌다”고 했다.

◇데이터도 판매

이 회사는 2주 전부터 대대적인 증설 공사에 돌입했다. 불량률은 물론 시행착오가 줄면서, 생산효율이 높아지자 ‘AI 도금 라인’을 2개로 늘리려는 것이다. 인력도 10명쯤 충원할 계획이다. 전 이사는 “이제는 도금용액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라인 자체를 판매해, 초보자도 쉽게 도금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며 “AI로 뿌리산업을 한번 살려보고 싶다”고 했다.

중기부는 14일 ‘AI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사업인 캠프 포털 사이트를 열고 점차 이 사업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중기부 관계자는 “AI 도입에 관심 있는 중소 제조기업들은 공장 데이터 수집부터 분석, 클라우드 등 다양한 자원을 포털에서 무료로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