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 단가를 900원으로 설정해 원청업체와 계약을 맺습니다. 부품을 납품하면 대금을 지급해줍니다. 그런데 나중에 원청업체가 ‘그 단가는 확정단가가 아니었다'며 단가를 800원으로 낮추더니, 차액을 돌려달랍니다. 이런 것을 ‘가(假)단가’라고 합니다.”(자동차 부품 제조 2차 협력사 관계자)

본지가 9일 입수한 중소기업중앙회·한국노총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 불공정거래 실태조사’ 문서에 나온 내용 중 하나다. 중소기업들은 코로나 와중에도 단가 후려치기, 계약서에 적힌 단가를 대놓고 무시하는 가단가 등 일상적 ‘갑질’을 당하고 있었다. 익명으로 면접에 응한 경기 지역 A 부품사의 노조위원장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원청업체의 갑질이 더 심해졌다”며 “경기 상황이 나빠지자 자기들의 이익률을 유지하기 위해 단가 인하 요구를 이전보다 강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중소기업들의 하소연

◇코로나 속 더 심해진 ‘쥐어짜기’

흔히 쓰이는 수법은 일단 작업부터 시키고, 대금이 적힌 계약서를 나중에 주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30일 대우조선해양을 검찰에 고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이 지난해까지 최근 5년 새 중소 업체에 선박·해양 플랜트 제조작업을 위탁하면서, 작업 내용과 대금 등이 적힌 계약서를 작업 시작 후에 발급한 사례는 1만6681건이었다. 하도급 계약을 맺은 중소 업체는 구체적인 작업 내용이 무엇인지, 대금은 얼마나 받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나중에 일방적으로 통보되는 대금을 받아들여야 했다.

정부 정책 변화에 따라 생기는 부담도 중소기업에 떠넘겨지는 경우가 많다. 한 대기업 2차 협력사 관계자는 “해마다 최저임금은 오르고, 원재료값도 인상되는데 이런 인상분이 단가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며 “환경 관련 규제로 인한 비용 지출 부담도 해마다 커지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 밖에도 “일본 부품업체와 MOU를 체결하려는데 먼저 거래하던 원청업체가 이를 반대해 불발되고, 결국 원청업체가 지정해준 업체와 MOU를 맺었다” “30만 개를 생산해 납품하기로 약정해 설비와 시스템을 갖춰놨는데,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납품량을 3만 개로 줄여 울며 겨자 먹기로 손해 보며 납품했다” 등 다양한 피해 사례가 등장한다.

◇ “거래 끊길까 말 못 해”

한국 기업의 99.9%인 중소기업들은 올해 코로나를 온몸으로 맞으며 폐업의 기로에 섰지만 정부·국회가 주 52시간제 전면 시행,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추진 등 중소기업을 더욱 옥죄는 일만 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원청기업 갑질을 막기 위한 하도급법·상생협력법 개정안도 발의는 돼 있지만 여야가 정쟁(政爭)에만 몰두하며 올해도 처리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기댈 곳 없는 ‘을(乙)의 반란’은 또 허사가 될 상황에 놓였다.

결국 중소기업들은 아무 일 없는 듯 침묵을 택한다. 충남 지역 B부품사의 노조위원장은 “4~5년 전만 해도 회사에서 ‘단가 후려치기’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요새는 없다”며 “원사업자가 요새 단가 후려치기를 안 해서가 아니라 얘기해도 해결 방안이 없으니 아예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C사 노조위원장은 “과거 원사업자의 불공정 행위를 공정위에 신고했다가 거래가 끊겨 폐업한 부품사들이 있었고, 모든 부품사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고할 수가 없다”고 했다.

중기중앙회가 지난 10월 자동차 부품 납품사 100곳을 대상으로 한 ‘대·중소기업 불공정 거래 설문조사’에서, 중소기업들이 ‘필요한 조치'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제도 보완'(58%·복수응답)과 ‘처벌 강화'(30%)였다. 다음으로는 ‘상생협약 체결'(29%), ‘교육 강화'(23%), ‘징벌적 손해배상 강화'(19%) 등의 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