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서울시 마포구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한 시민이 전동킥보드를 타고 있다. /장련성 기자

전동킥보드 법을 완화해달라던 업체들은 스스로 ‘법 규정 이상으로 준수하겠다’ 하고, 사실상 만장일치로 법을 완화해준 국회는 다시 법을 고치겠다고 나섰다. 법 완화를 주도한 정부는 부랴부랴 단속·처벌을 강화했다.

전동 킥보드 탑승 연령 등을 대폭 완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의 다음달 시행을 앞두고 킥보드 업계와 정부, 국회가 웃지못할 촌극(寸劇)을 벌이고 있다. 킥보드 사고가 급증하는 가운데 업계의 ‘규제 완화’ 주장을 받아들여, 정부가 앞장서고, 국회도 이를 통과시켜 줬는데 사고 우려가 점점 더 커지자 개정 법이 시행되기도 이전에 모두가 이를 외면, 법이 ‘무용지물’이 돼 버린 것이다.

◇시행 전부터 무용지물 ‘킥보드 법’

스타트업 단체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주요 공유 킥보드 업체들이 앞으로도 만 16세 이상에만 킥보드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다음 달 10일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전동 킥보드 이용 연령이 기존 만 16세 이상에서 만 13세 이상으로 낮아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체 연령 확인과 면허 인증 등을 통해 기존처럼 만 16세 이상으로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또 법이 규정한 전동 킥보드의 최대 속도인 시속 25㎞도 자율적으로 하향 조정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법은 문턱을 낮춰줬는데, 업체들이 자발적으로 기준을 높이는 이례적인 모양새가 된 것이다.

이번 결정에는 시장 점유율이 높은 킥고잉, 씽씽을 비롯해 다트, 디어, 라임, 빔, 스윙, 알파카, 윈드, 일레클, 지쿠터, 플라워로드, 하이킥 등 포럼 산하 퍼스널모빌리티산업협의회(SPMA) 회원사 13곳이 참여했다.

◇사고 늘어나는데, 업계·정부·국회 법 완화 나서

이용자와 매출이 늘어날 수 있는 법 시행을 앞두고, 업체들이 스스로 법을 거스르기로 한 것은 다음달 시행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에 대한 비판 여론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지난 5월 국회에서 통과된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기존에 소형 오토바이처럼 ‘원동기 장치 자전거’로 여겨지던 전동 킥보드를 사실상 ‘자전거’와 동일하게 취급하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만 16세 이상 면허 취득자(원동기 혹은 2종 보통 이상)가 차도(車道)에서만 탈 수 있던 것을, 운전 면허 없이 만 13세 이상이면 누구나 자전거 도로에서 최대 시속 25㎞로 탈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 또 ‘헬멧 의무착용’ 규정은 그대로지만 범칙금을 없애 실효성이 낮아졌다.

이런 법 개정은 ‘전동 킥보드 산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업계의 요구 때문이었다. 지난해 3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주최한 ‘제5차 규제·제도혁신 해커톤’에는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등 관계 부처와 모빌리티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전동 킥보드의 자전거도로 주행 허가, 면허 규제 완화 방안 등을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전동 킥보드가 시속 25㎞ 이하 속도로 자전거 도로를 주행하도록 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관련 부처가 조율해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위해 노력한다”는 공동 합의문까지 작성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역시 업계 의견을 수용해 ‘전동킥보드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고 앞장섰다. 결국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지난 5월20일 투표 의원 184명 중 183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하지만 법 통과 이후 ‘전동킥보드 사고가 급증하는데 오히려 법을 완화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 49건에 그쳤던 전동킥보드 사고는 매년 급증해 지난해에는 890건을 기록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작년 수준에 육박하는 886건이 발생했다. 대부분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아 뇌를 다친 중상자나 사망자도 나왔다. 술 마시고 집에 갈 때 전동킥보드를 타는 음주운전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개정법에 따라 자전거로 분류되면서 이제는 형사처벌 없이 범칙금 3만원만 내면 된다.

◇결국 업체들 “기존 정책 따르겠다”

비판이 잇따르자, 국회는 부랴부랴 개정 법이 시행도 되기 전에 다시 법을 강화하는 재(再)개정안을 쏟아내고 있다. 탑승 연령을 높이고 다시 면허를 요구하며, 음주운전 처벌도 강화하는 내용 등이다. 자전거 도로를 다니는 전동킥보드가 자전거 평균 속도(시속 15㎞)보다 빠른 최대 시속 25㎞인만큼 이를 낮추자는 법안도 올라와있다.

탑승 연령 자체 강화를 밝힌 13개 킥보드 업체들은 ‘자발적 결정’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런 분위기 속에 눈치를 보며 후퇴한 셈이다. 일각에선 ‘헬멧 미착용, 2명 이상 탑승, 면허증 위조 등 각종 불법을 막으려는 근본 조치는 없고 당장 탑승 연령만 높여 급한 불만 끄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킥보드 업체 13곳이 소속된 퍼스널모빌리티산업협의회 관계자는 “그간 서울시, 국토부와 전동킥보드 안전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협의해왔고, 이번 결정도 그 과정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내린 것”이라며 “안전한 이동이 전제돼야 전동 킥보드 산업도 발전할 수 있는만큼 앞으로도 지자체, 관련 부처, 국회 등과 적극 소통하고 협력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