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진이 물의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세계 최초로 실험으로 확인했다. 물이 서로 다른 두 액체 상태를 오갈 수 있고, 그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 영하 60도 안팎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관측한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김경환 포스텍 교수 연구진이 앤더스 닐슨 스웨덴 스톡홀름대 교수 연구진과 함께 물의 ‘액체-액체 임계점’을 세계 최초로 관측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이날 게재됐다.
물은 가장 흔하면서도 중요한 물질이지만,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물질로 꼽힌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밀도다. 대부분의 액체는 온도가 내려갈수록 분자들이 더 촘촘히 모여 밀도가 높아지지만, 물은 4도에서 가장 조밀해졌다가 그보다 더 차가워지면 오히려 성기게 변한다. 겨울철 강과 호수가 바닥부터가 아니라 표면부터 어는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다. 표면의 차가운 물이 더 가벼워 위에 머물고, 그 위가 먼저 얼어붙으면서 아래에는 액체 상태의 물이 남게 된다.
과학자들은 이런 물의 독특한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약 30년 전부터 하나의 가설을 제시해 왔다. 물이 하나의 균일한 액체가 아니라, 분자들이 더 촘촘히 모인 고밀도 액체 상태와 더 느슨하게 배열된 저밀도 액체 상태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물은 차가워질수록 처음에는 다른 액체처럼 더 촘촘해지지만, 일정 온도 아래에서는 저밀도 상태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4도 부근에서 전체 밀도가 가장 높아지고, 그보다 더 낮은 온도에서는 오히려 밀도가 다시 낮아진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 가설이 맞는지 가르는 핵심은 결국 액체-액체 임계점이 실제로 존재하느냐였다. 아주 낮은 온도와 높은 압력에서는 두 액체 상태가 뚜렷하게 구분되지만, 특정 온도와 압력에 이르면 둘의 경계가 사라져 하나의 액체처럼 보이게 되는데, 그 지점을 액체-액체 임계점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시뮬레이션과 이론 연구에서는 고압의 영하 60도 부근에 액체-액체 임계점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물은 극저온 구간에서 매우 빠르게 얼어버리는 탓에 이를 실험으로 직접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존재를 뒷받침하거나 반박할 결정적 실험 증거도 없었다.
김 교수 연구진은 지난 10년간 이 임계점을 추적해 왔다. 2017년에는 영하 45도 이하에서도 얼지 않은 물을 세계 최초로 측정했고, 2020년에는 관측 범위를 영하 70도까지 넓혀 물이 실제로 두 액체 상태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번 연구에서는 더 나아가 두 액체 상태가 어디에서 하나로 합쳐지는지를 직접 포착했다.
연구진은 영하 70도에서 얼지 않은 극미량의 물을 만든 뒤, 10조분의 1초 단위로 분자 움직임을 추적했다. 그 결과, 물의 두 액체 상태가 하나의 상으로 합쳐지기 시작하는 지점, 즉 액체-액체 임계점이 영하 60도 안팎(오차 ±8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수십 년 동안 이론으로만 제시돼온 가설에 실험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김 교수는 “10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상온의 물은 고밀도 물과 저밀도 물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에 있으며, 온도에 따라 두 상태의 비율이 달라지면서 물 특유의 성질이 나타난다는 가설에 더 힘을 실었다”며 “물의 특성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산업 현장과 연구 전반의 정확도를 궁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오는 5월 포항 4세대 가속기 실험을 통해 이번에 제시한 임계점의 위치를 더 정밀하게 좁혀나갈 계획이다.
참고 자료
Science(2026),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ec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