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에서 키운 어린 비단뱀들. 혈액에서 식욕 억제 물질이 나욌다./미 콜로라도대

위고비나 마운자로 같은 비만 치료제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지만 메스꺼움이나 복통, 근육 손실 같은 부작용이 두려워 복용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한 번 마음껏 먹고 몇 달씩 굶어도 아무런 부작용 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비만약이 있다면 어떨까. 미국 과학자들이 폭식 후 장기간 금식을 하는 비단뱀에서 꿈의 비만 치료제 후보물질을 찾았다.

미국 콜로라도대 분자세포생물학과의 레슬리 라인완드(Leslie Leinwand) 교수 연구진은 “비단뱀의 혈액에서 엄청난 양의 먹이를 섭취하고 수개월씩 먹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는 식욕 억제 화합물을 발견했다”고 20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메타볼리즘’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비단뱀의 혈액 성분을 생쥐에 투여해 식욕 억제 효과를 입증했다.

버마 비단뱀은 몸길이가 5m가 넘고 몸무게는 100㎏에 육박한다. 야생에서 비단뱀은 영양을 통째로 삼키는 식으로 단숨에 자기 체중만큼 먹이를 먹는다. 20년간 비단뱀을 연구한 라인완드 교수에 따르면 비단뱀이 한 번 폭식을 하면 몇 시간 동안 심장이 25% 팽창하고 신진대사는 4000배 빨라져 소화를 돕는다. 이후 12~18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건강을 유지한다.

콜로라도대의 레슬리 라인완드 교수(왼쪽)와 비단뱀을 들고 있는 대학원생 스킵 매스./미 콜로라도대

◇비만 생쥐의 체중, 28일 만에 9% 줄여

라인완드 교수는 스탠퍼드대 의대의 조나단 롱(Jonathan Long) 교수와 함께 비단뱀의 혈액에서 극단적인 금식 능력을 뒷받침하는 물질을 추적했다. 롱 교수는 앞서 경주마의 혈액에서 격렬한 질주를 견디게 해주는 물질을 찾아냈다. 연구실에서 키운 어린 비단뱀들은 체중이 1.5~2.5㎏이었다. 이들은 28일간 굶고 지내다 한 번에 자기 몸무게의 25%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었다. 연구진은 폭식 전후로 비단뱀의 혈액을 채취해서 성분을 분석했다.

연구진은 비단뱀이 먹이를 먹고 몇 시간 안에 혈액에서 농도가 크게 늘어난 성분 200여 가지를 확인했다. 그중 파라-티라민-O-황산염(para-tyramine-O-sulphate, pTOS)은 1000배 이상 증가했다. 이 물질은 아미노산인 티로신에서 유래한 티라민에 황산기가 결합한 형태다. pTOS는 뱀의 장내 세균이 만들며, 인간의 소변에서도 미량 있다고 알려졌다.

비단뱀의 pTOS를 비만 생쥐에게 투여하자 먹이 섭취량이 줄면서 28일 후 체중 9%가 감소했다. 위고비나 마운자로 같은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계열의 비만 치료제 효과를 낸 것이다. GLP-1은 식후 소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췌장에서 혈당을 낮추는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고 혈당을 올리는 글루카곤을 억제한다. 이를 모방한 약물은 원래 혈당을 줄이는 당뇨병 치료제로 나왔다가 체중 감량 효과가 확인되면서 비만 치료제로 발전했다.

GLP-1 계열 비만 치료제는 뇌에서 식욕을 줄이면서 동시에 음식이 위를 떠나는 속도를 늦춰 포만감을 높여 체중을 줄인다. 반면 pTOS는 생쥐의 에너지 소비량이나 장기 크기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변한 것은 오직 식욕뿐이었다. 공동 교신 저자인 수용(Yong Xu) 베일러 의대 교수는 생쥐에게 투여한 pTOS가 뇌의 식욕 조절 중추인 시상하부에 작용해 위장 문제나 근육 손실, 에너지 저하를 유발하지 않으면서 체중 감소를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아메리카독도마뱀. 미국의 일라리 릴리와 아밀린 파마슈티걸은 1992년 독도마뱀의 독에서 추출한 물질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의 GLP-1 계열 당뇨병 치료제를 개발했다./미 노스 캐롤라이나 동물원

◇근육 손실, 소화기관 부작용 없어

라인완드 교수는 “GLP-1 계열 약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없는 새로운 식욕 억제제를 발견한 성과”라고 말했다. GLP-1 계열 비만 치료제는 소화기관의 배출 속도를 늦추다 보니 더러 메스꺼움이나 변비, 복통 같은 부작용을 유발한다. 반면 비단뱀의 혈액 성분은 오직 식욕만 줄여 그런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비단뱀이 폭식 후 장기간 금식해도 건강에 문제가 없는 것도 그 효과로 볼 수 있다.

pTOS는 인간의 소변에서 미량으로 검출되지만 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동안 생쥐나 시궁쥐가 인간을 대신해 실험동물로 쓰였기 때문에 pTOS의 효과가 간과됐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롱 교수는 “대사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쥐나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 자연이 제공하는 가장 극단적인 대사 현상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라인완드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가 인간에 적용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pTOS가 인간에게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물질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앞서 같은 파충류인 아메리카독도마뱀(Gila monster)에서 당뇨병 치료제가 나온 데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미국의 제약사인 일라이 릴리와 아밀린 파마슈티컬스는 1992년 아메리카독도마뱀의 독에서 추출한 물질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의 GLP-1 계열 당뇨병 치료제인 엑세나타이드(exenatide)를 개발했다. 이 약은 이후 GLP-1 당뇨·비만 치료제 개발의 토대가 됐다.

라인완드 교수와 롱 교수는 비단뱀 혈액 성분을 치료제로 상용화하기 위해 스타트업 아르카나 테라퓨틱스(Arkana Therapeutics)를 설립했다. 연구진은 비단뱀 혈액 성분이 체중을 줄이면서 근육 감소는 부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만뿐 아니라 노화나 질병에 의한 근육 감소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참고 자료

Nature Metabolism(2026), DOI: https://doi.org/10.1038/s42255-026-014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