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그룹이 오너가(家) 경영권 분쟁을 봉합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공식화한 지 1년 만에 대주주와 경영진 간 갈등이 재점화하고 있다.
갈등의 한 축은 창업자 일가의 분쟁을 중재하던 ‘키맨’에서 지분 30%를 거머쥔 ‘절대 권력’으로 부상한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이다. 그 맞은편에는 오너 모녀의 신임 속에 등판한 30년 경력의 ‘정통 한미맨’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가까스로 안착하는 듯했던 한미약품의 전문경영인 체제가 1년 만에 대주주와 경영진 간의 전면전으로 비화하며 최대 시험대에 올랐다.
◇故임성기 회장 고향 후배서 그룹 운명 쥔 ‘절대 권력’으로
신동국 회장은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의 고향(경기 김포 통진읍) 후배이자 고교 동문이다. 고향 모임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장학회 공동 설립 등으로 이어지며 각별해졌다.
신 회장이 한미의 ‘우군’으로 본격 등장한 것은 2000년 한미약품의 동신제약 인수전 때다. 당시 신 회장이 보유 지분을 임 전 회장에게 넘기며 굳건한 신뢰를 쌓았고, 2010년에는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지분 12.5%를 420억 원에 매입하며 주요 주주로 등극했다.
2020년 임 전 회장 타계 후, 신 회장의 존재감은 그룹 지배구조의 방향을 가르는 ‘키맨’으로 진화했다. 2024년 불거진 오너 일가 경영권 분쟁 초기에는 장·차남(임종윤·종훈 형제)의 손을 들어줬으나, 이후 투자 유치 방식 등을 두고 갈등을 빚자 돌연 송영숙 회장·임주현 부회장 모녀 측으로 돌아서며 이른바 ‘4자 연합’을 결성했다.
최근에는 장남 임종윤 북경한미 동사장의 개인 회사 측 지분까지 대거 매입하며 한미사이언스 지분율을 29.83%(한양정밀 보유분 포함)까지 끌어올렸다. 사실상 그룹 전체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절대 권력으로 올라선 셈이다.
◇‘전문경영인’ 박재현 대표, 모녀의 든든한 ‘정통 한미맨’
신 회장과 4자 연합이 선임한 전문경영인 박재현 대표와의 충돌은 지난해 말부터 격화했다.
박 대표는 연구·생산 분야에서 30년 이상 몸담은 ‘정통 한미맨’으로 꼽힌다. 제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입사해 팔탄공장장과 제조부문장을 거친 생산·품질 전문가다.
그는 임주현 부회장이 라데팡스파트너스와 함께 지주사 전략기획실 중심의 경영 체제를 구축하던 지난해 3월 대표이사에 선임되며 모녀 측의 신임을 받아왔다.
갈등의 도화선은 지난해 12월 팔탄공장 임원 성추행 사건이었다. 박 대표는 신 회장의 압력으로 적절한 인사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공익 제보로 시작된 이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조치와 징계가 미흡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파장이 커졌다.
박 대표는 신 회장과의 대화 녹취도 공개했다. 녹취에 따르면 신 회장은 “그 사람이 여자 성폭행할 사람도 아니잖아”라며 가해자를 두둔했고, 박 대표의 징계 필요성 설명을 끊으며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질책했다.
박 대표는 기타비상무이사인 신 회장이 이사회에서 징계를 저지했다고도 주장했다. 해당 임원은 별도 징계 없이 자진 사퇴 형식으로 회사를 떠났다.
그는 또 신 회장이 원가 절감을 위해 저가 원료 사용과 품질 관련 투자 축소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임원이 대표를 거치지 않고 신 회장 지시를 따랐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신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성추행 비호 및 경영 간섭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경영권 분쟁 재점화 가능성 역시 과도한 해석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박 대표가 추가 녹취 공개를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공방은 현재진행형이다.
◇ 3월 주총, 박 대표 연임 여부가 권력 지형 가를 듯
하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한미약품 평택, 팔탄공장 직원들을 필두로 임직원들은 서울 송파구 본사에서 신 회장의 경영 간섭 중단과 사과를 촉구하는 릴레이 시위에 돌입했다. 내부 구성원들의 동요가 극에 달한 상태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다음 달 열리는 한미약품 정기 주주총회에서 최종 결판이 날 전망이다. 공교롭게도 내달 주총에서는 박 대표의 임기 만료에 따른 연임 안건이 다뤄진다.
지분 30%를 무기로 이사회 물갈이를 예고한 신 회장이 어떤 선택을 할 지에 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내부 임직원의 지지를 업은 박 대표에 대한 연임 여부에 따라 그룹 권력 지형이 다시 요동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