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만 8000년 전의 ‘경배하는 자’ 조각상은 작은 상아판에 인형 모양과 여러 줄의 홈과 점이 새겨져 있다./독일 뷔르템베르크 주립박물관

기원전 3500~3000년 지금의 이라크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은 갈대 펜으로 점토판에 쐐기 모양의 기호를 새겼다. 바로 인류 최고(最古)의 문자인 설형문자(楔形文字)이다. 어쩌면 문자의 발명 연대가 3만년이나 더 앞당겨질지 모른다. 독일에서 발굴된 4만년 전 석기 시대 유물에서 설형문자와 비슷한 기호들이 확인됐다.

독일 자를란트대의 크리스티안 벤츠(Christian Bentz) 교수와 베를린 선사박물관의 에바 두트키에비츠(Ewa Dutkiewicz) 박사는 “독일의 석기시대 유물에 새겨진 기호들의 순서가 설형문자와 동일한 수준의 복잡성과 정보 밀도를 지녔음을 확인했다”고 24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당시 기호들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정보를 담을 만한 체계를 갖췄다는 의미다.

◇호모 사피엔스의 이주 시기와 일치

1860년대 고고학자들이 독일 남서부 슈바벤 알프스 기슭의 동굴에서 밧줄과 옷을 만드는 도구와 악기, 인간과 동물이 섞인 조각상 수백 점을 발굴했다. 모두 매머드와 동굴사자, 동굴곰 등 지금은 멸종된 동물들의 엄니와 뼈로 만든 유물이었다. 벤츠 교수는 4만3000년에서 3만4000년 전에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이 유물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의 상징적 전조(前兆)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유물 260점에는 22가지 기호가 3000회 이상 새겨져 있었다. 가장 자주 쓴 기호는 V자 홈이었고, 선, 십자, 점이 그 뒤를 이었다. Y자나 별 모양 기호는 덜 쓰였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고대 그리스어와 같이 적힌 로제타석 같은 결정적 증거가 없이는 지금으로선 이 기호들을 해독할 방법이 없다. 대신 연구진은 기호들의 순서를 분석했다. 의미를 찾는 대신 정보를 담을 만큼 문자로서 복잡성을 가졌는지 조사한 것이다.

독일 보겔헤르트 동굴에서 발견된 약 4만 년 전의 매머드 조각상(왼쪽)과 기원전 3500년 수메르인의 점토판(오른쪽). 매머드 조각상에 새겨진 기호들의 체계는 복잡성과 정보 밀도에서 수메르인의 설형문자와 비슷한 패턴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독일 튀빙겐대, 베를린 국립박물관

연구진은 컴퓨터로 기호들의 배열이 지닌 복잡성과 정보 밀도를 분석했다. 그 결과를 다시 기원전 3500~3350년에 등장한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현대 문자와 각각 비교했다. 분석 결과 4만년 전 기호 서열은 현대 문자와 뚜렷이 구별됐지만 원시 설형문자와는 유사했다. 에바 두트키에비츠 박사는 “인류는 예전부터 물건에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겼지만, 이번처럼 서로 구별되는 명확한 표시를 체계적으로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나온 유물은 약 4만5000년 전 유럽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 집단이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연구진은 유럽 최초의 수렵채집인이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이미 4만년 전부터 자신들의 생각을 남기기 위해 기호 체계를 발전시켰음을 시사하는 결과라고 밝혔다. 벤츠 교수는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갈 당시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인지 능력을 지녔을 것”이라며 “인류가 그렇게 오랫동안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을 실험해 온 것이 결국 놀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인간·동물에 다른 기호 써, 달력일 수도

설형문자는 농경 문화가 발전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농작물 수확량 같은 것을 기록하는 회계 체계로 시작됐다. 그렇다면 석기시대 문자는 무엇을 담았을까. 단서는 유물에 따라 사용된 기호가 달랐다는 점에 있다. 십자는 말이나 매머드를 새긴 유물이나 도구에는 자주 쓰인 기호였지만 인간을 묘사한 유물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반면 점은 도구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두트키에비츠 박사는 “매체에 적용된 기호들이 의도적으로 선택됐음을 알려주는 확고한 패턴”이라고 설명했다. 십자는 인간을 설명하는 의미가 아니고 점은 생명을 가진 대상에만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기호가 정보를 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유럽의 동굴벽화에 그려진 동물 그림 옆에는 선들도 새겨져 있다. 과학자들은 이 선들이 사냥감을 설명하는 문자 역할을 했다고 추정했다./케임브리지 고고학 저널

미국 워싱턴대 인류학과의 벤 마윅(Ben Marwick) 교수는 이날 사이언스지에 “기하학적 표식들은 중요한 정보 기술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매머드 같은 대형 동물을 사냥하는 데 필요한 복잡한 사회적 협력을 지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23년 영국 더럼대 연구진은 유럽의 2만년 전 동굴에 그려진 동물 그림 옆에 점과 선, Y자형 기호가 연속적으로 배치된 것이 사냥감의 습성을 기록하기 위한 암호였다고 주장했다.

이번 연구진은 독일 유물에 새겨진 기호가 달력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예를 들어 매머드 엄니로 만든 사자와 인간 혼합 형상에는 13개 또는 12개 줄로 배열된 점과 홈이 새겨져 있다. 두트키에비츠 박사는 이것이 달력 관측일 수 있다고 말했다. 1년에 12~13번 달이 뜨고 지는 것을 기호로 남겼다는 의미다. 사냥감이 이동하는 시기를 알려면 달력이 반드시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슈바벤 사냥꾼들의 기호는 완전한 문자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마윅 교수는 당시 사회는 아직 정교한 문자까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수렵채집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이를 바꿀 압박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훨씬 뒤에 나타난 농경 사회에서는 인구가 급증하고 상업까지 발전하면서 복잡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공식적인 문자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PNAS(2026), DOI: https://doi.org/10.1073/pnas.2520385123

Cambridge Archaeological Journal(2023), DOI: https://doi.org/10.1017/S095977432200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