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이 사내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고위 임원에 대해 징계는커녕 ‘자진 퇴사’ 형식을 빌려 조용히 내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이 임원은 별다른 제재 없이 경쟁사인 광동제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굴지의 제약사가 성 비위 임원에게 사실상 ‘재취업 꽃길’을 터줬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13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 생산의 핵심인 팔탄공장을 총괄하던 임원 A씨에 대한 성추행 신고가 접수된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외부 공익 제보 채널인 ‘K-휘슬(K-Whistle)’을 통해 A씨가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과 언행을 했다는 구체적인 피해 사실이 신고됐다. K-휘슬은 기업과 고용노동부 등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외부 위탁형 익명 제보 시스템으로, 부패·비리, 성 비위 사안을 접수해 해당 기관에 전달하는 구조다.
문제는 신고 접수 이후 한미약품의 대응이다. 현행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지체 없는 조사와 피해자 보호 조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약품은 두 달 가까이 처분과 조치 없이 사실상 상황을 방치했다. 그사이 A씨는 보란 듯이 회사에 출근해 회의를 주재하고 직원들을 지휘했다.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조치가 즉시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물론 인사권과 평가권을 쥔 임원이라는 우월적 지위 탓에 피해자와 직원들은 2차 가해 가능성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A씨는 한미약품이 공시한 사업보고서에도 이름이 오른 주요 임원으로, 팔탄공장 인사·평가·업무 배치 등 직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A씨를 ‘여미새(여자에 미친 사람)’로 지칭하며 비판하는 글까지 올라왔으나, 해당 게시물은 신고로 삭제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갑자기 나가는 게 이상하긴 했다’, ‘ㅅㅊㅎ으로 나간 사람들 특징이 자기한테 유리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고 나간다’는 등의 댓글이 달린 게시글도 신고로 삭제됐다.
회사의 결론은 ‘솜방망이’도 아닌 ‘면죄부’였다. 통상 임원의 비위가 확인되면 대표이사 직권으로 즉각 해촉할 수 있다.
하지만 한미약품은 A씨에게 징계 기록이 남지 않는 ‘자진 퇴사’라는 퇴로를 열어줬다. 덕분에 A씨는 성 비위 사실을 감추고 경쟁사인 광동제약으로 이직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계 관계자는 “위계 구조에서 발생한 신체 접촉은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서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에서는 지위와 영향력이 법적 판단 요소로 고려되는 만큼 사안이 더욱 엄중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본지는 A씨의 징계 무마 의혹과 적절성 여부를 묻기 위해 한미약품 인사팀과 팔탄공장 총무부에 각각 A씨와 연결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두 “회신 전화를 주겠다”는 말만 하고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해당 임원 조치가 적절했는지 여부를 묻기 위해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에게 연락했으나 답변이 없었다.
해당 논란에 대해 한미약품 홍보실 관계자는 “외부 제보 채널(K-휘슬)로 해당 건이 접수된 이후, 공정하게 처리하기 위한 절차를 밟은 것으로 안다”며 “제보된 내용 특성상 상세한 내용은 알지 못해 설명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광동제약 관계자도 답하지 않았다.